2025-08-23 14:15 (토)
◇김수종의 취재여록 ㉕ 석유로 읽는 미국 역사 (4) 알래스카의 '진가'
◇김수종의 취재여록 ㉕ 석유로 읽는 미국 역사 (4) 알래스카의 '진가'
  • 이코노텔링 김수종 편집고문(전 한국일보 주필)
  • diamond1516@hanmail.net
  • 승인 2025.08.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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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러시아에서 사들인 미국은 북극해와 베링해를 연결하는 전략적 통로 장악
미국 조야의 반대여론 무릅쓴 스워드 국무부 장관의 통찰이 미국의 미래비전 구현
트럼프와 푸틴의 알래스카 정상회담 지켜보면서 한가닥 '역사의 아이러니' 떠올라
21세기, 기후변화와 북극해 항로 개방이 본격화하면서 북극해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 석유보다 값진 땅, 알래스카

제정 러시아 황실이 720만 달러를 받고 알래스카를 미국에 넘긴 지 꼭 100년 후, 그 땅에서 석유가 터졌을 때 러시아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40여 년 전 푸르도베이 유전을 취재할 때, 장대하고 수려한 알래스카의 자연을 바라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땅을 치며 애석해하고, 매각을 주도한 인물을 자자손손 '정묘역적'이라 부르며 저주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 러시아 못 믿어, 국무부에 불을 밝혀라

미국 상선 셔먼호가 대동강을 침범하여 통상을 요구하다가 조선군에 의해 몰살된 사건이 일어난 게 1866년이었습니다. 의기양양한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던 때였습니다.

그 이듬해인 1867년 3월 29일 금요일 밤 10시, 미국 워싱턴 D.C.의 윌리엄 스워드 국무장관 자택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당시 스워드는 링컨 대통령 암살 사건 때 괴한의 공격으로 크게 다쳐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습니다. 그를 찾아온 이는 워싱턴 주재 러시아 공사 에두아르드 스토에클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몇 달 동안 비밀리에 알래스카 매매 협상을 이어오고 있었고, 스워드는 이미 "720만 달러에 매입하겠다"는 최종안을 제시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스토에클은 "황제 폐하께서 북아메리카 영토(알래스카) 매각을 재가하셨습니다"라고 본국의 훈령을 전하면서 "지금은 주말이니 월요일에 서명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스워드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당신네 정부가 마음을 바꿀 수 있으니 기다리면 안됩니다. 국무부에 촛불을 켜고라도 오늘 밤 문서를 완성하겠습니다"

그날 밤 국무부는 비상 소집됐고, 3월 30일 새벽 4시, 양측은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조건은 러시아가 알래스카의 주권을 미국에 완전히 이양하고, 미국은 720만 달러를 금 태환어음으로 지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면적은 미국 본토의 약 20%에 달했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부동산 거래'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 반대와 설득

조약이 4월 1일 공개되자 워싱턴 정가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 술렁였습니다. 상원 다수와 언론은 "스워드의 아이스박스", "북극곰 농장"이라는 조롱을 퍼부었고, '스워드의 우행(愚行)'이라는 표현이 널리 퍼졌습니다. 당시는 남북전쟁의 상흔이 깊고, 대통령직을 승계한 앤드루 존슨이 의회와 대립하며 고립된 상황이었습니다. 서부 개척도 한창이어서, "아직 개척할 땅도 많은데, 북극 얼음 땅에 720만 달러를 쏟아붓느냐"는 회의론이 설득력을 가졌습니다.

▪ 러시아의 계산, 미국의 기회

당시 러시아의 알래스카 매각 이유는 단순한 재정난을 넘어 지정학적 계산이 작용했습니다. 시베리아와 극동 방어조차 빠듯한 상황에서, 크림전쟁에서 영국 해군의 힘을 뼈저리게 느낀 러시아는 "전쟁이 재발하면 캐나다를 거점으로 한 영국군이 알래스카를 쉽게 점령할 것"을 우려했습니다. 차라리 우호적인 미국에 팔아 국가 재정을 보충하고, 동시에 북미에서 영국의 팽창을 견제하는 것이 이익이라 판단했습니다.

스워드는 이러한 러시아의 속내를 간파하고, 매입을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태평양 시대를 대비한 전략적 투자로 보았습니다. 그는 뉴욕주지사와 연방 상원의원을 역임한 노련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워싱턴과 뉴욕의 유력 신문에 광고를 싣고 편집인을 집중 설득했습니다. 러시아도 스토에클 공사를 통해 우호적인 기사와 논평을 공급하며 미국 조야의 알래스카 매입 찬성 여론을 다졌습니다. 오늘날 말하는 '언론 플레이'가 이미 작동했던 셈입니다.

결국, 스워드 장관의 설득과 전략은 상원에서도 통했습니다. 1867년 4월 9일, 상원은 조약을 승인했습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알래스카를 확보했으며, 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본 스워드의 비전이 현실화된 순간이었습니다.

▪ 100년 후 입증된 스워드의 비전

스워드 장관의 통찰은 100년 후 역사로 입증되었습니다. 알래스카를 거점으로 미국은 북극해와 베링해를 연결하는 전략적 통로를 장악했고, 서해안과 하와이를 거쳐 태평양을 내해처럼 활용하며 태평양 국가로 부상했습니다. 40년 전 알래스카에서 들은 실화가 있습니다. "알래스카가 미국 땅이 되지 않았다면, 소련 핵미사일 기지가 알래스카 남단 주노에서 불과 1,400km 떨어진 시애틀을 겨누고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말은 현실이 되어 나타날 뻔했습니다.

21세기, 기후변화와 북극해 항로 개방이 본격화하면서 북극해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고 있습니다. 역사 속 지도자의 진정한 자질은 단기 인기영합이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고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비전과 실행력임을 스워드 장관이 보여주었습니다.

지난 8월 15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알래스카에서 정상회담을 갖는 것을 TV를 통해 보았습니다. 158년 전 알래스카 매입의 역사적 상징성과 맞닿은 이 장면을 보면서 한가닥 역사의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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