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 회장단이 차가 막혀 지루해하자 멀리 보이는 배 보고 "우리 배"너스레

정주영 회장을 달변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둘 다 맞다. 다만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를 봤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평가가 나올 뿐이다.
현대 임직원들은 정 회장이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한마디씩 촌철살인 같은 짧은 말을 툭 던지거나 주로 혼내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직원 중에는 정 회장을 '호랑이' 이미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평소에 잘 웃지도 않고, 일자로 꾹 다문 입에서 "일을 이따위로 할 거야"라고 소리라도 치면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고 한다.
현대가 프로축구팀을 창설하고 팀명을 '현대 호랑이'라고 지은 이유가 다분히 정 회장을 의식한 작명이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정 회장은 달변가이기도 했다. 박학다식한 지식을 바탕으로 어떤 주제의 대화도 소화해냈다. 언론 인터뷰나 연설할 때 보면 막힘이 없었다. 하지만, 평소에 말이 적었던 것은 틀림없다.
전경련 회장 시절이던 81년, 아프리카 경제 교류 건으로 김용완 삼양사 회장, 박용한 대농 회장 등 회장단과 함께 나이지리아 출장을 간 적이 있다. 나이지리아 최대항구인 라고스를 방문했을 때 회장단은 호텔 펜트하우스에 숙박했다.
당시 수행했던 직원에 따르면 조용하던 옥상 펜트하우스에서 갑자기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려서 가보니 정 회장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고 한다.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 풍경이다. 정 회장은 강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상당히 수줍어하는 경향도 있었다.
당시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던 정 회장이 손님 접대용으로 과감하게 실력을 발휘했던 게 아닌가 싶다.
다음 날 아침, 나이지리아 국영 해운회사의 사장을 만나러 호텔을 출발했다. 대형 버스를 타고 갔는데 아침 교통체증이 너무 심했다. 2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를 거의 세 시간 만에 갔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 정 회장이 너무 미안해하더라고 했다. 회장단이 지루할까 봐 버스 안에서 계속 이야기를 했다. 수행했던 현대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정 회장이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고 했다.
"현대조선이 나이지리아에 화물선 11척을 수출했다"라는 말을 하던 도중 마침 배 한 척이 보였다. 그러자 정 회장이 손가락으로 배를 가리키며 "저 배가 우리가 만들어서 수출한 배"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수행 직원들이 깜짝 놀랐다. 우리도 모르는 걸 어떻게 회장님이 알고 계실까.
정 회장의 뛰어난 임기응변이었다. 다른 회장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일도 아니었다. 정 회장은 계속해서 배 수출 이야기를 이어갔다고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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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한일보와 합동 통신사를 거쳐 중앙일보 체육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4년 LA 올림픽, 86 서울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 베이징아시안게임, 92 바르셀로나올림픽, 96 애틀랜타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체육기자 생활을 끝낸 뒤에도 삼성 스포츠단 상무와 명지대 체육부장 등 계속 체육계에서 일했다. 고려대 체육언론인회 회장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