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가의 아들로 니체에 심취한 앤더슨, 자금 대주는 아버지를 도우며 천연가스 탐사
1967년 북미 최대유전, 푸르도베이 터져…송유관 건설,환경운동과 원주민 반발 불러

소하이오 공보담당자 토니 킨더넥 씨가 "푸르도베이 유전 시설중 아주 특별한 곳"이라며 안내해 준 곳은 알래스카 대송유관의 시작점이었습니다.
툰드라 초원 위로 직경 1.2m의 거대한 파이프가 불쑥 솟아올라 지지대위로 끝없이 뻗어 있었지요. 섭씨 90도의 뜨거운 석유가 이 파이프 속을 흘러 1,288km 떨어진 알래스카 남단의 발데즈 항구까지 수송된다는 겁니다. 동토를 건너고 유콘강을 비롯해 500개의 하천을 지나고 건너고 빙하의 산악지대를 통과해야 하는 긴 여정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얼핏 보기에 거대한 수도관과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알고 보니 알래스카 대송유관은 미국 역사상, 아니 세계 석유 개발사에서 가장 큰 토목공사였을 뿐 아니라 푸르도베이 유전의 성패가 걸린 논쟁의 중심이었습니다.
■ 석유로 향한 탐욕과 도전의 역사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1857년 처음 석유가 터진 이래, 19세기 말 캘리포니아 LA 근처, 그리고 20세기 초에는 텍사스에서도 석유가 솟아오르면서 미국의 부의 역사가 다시 쓰였습니다. 때마침 자동차산업이 꽃피고, 영국 해군이 석탄 대신 석유를 군함 연료로 사용하면서 석유 개발은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의 주된 투자 대상이 되었지요. 석유 정제 공장을 합병하여 스탠더드 오일을 키운 존 록펠러는 미국 자본주의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알래스카의 석유 개발에 불씨가 당겨진 것은 1923년 워런 하딩 대통령이 북극해 일대를 해군석유비축지(Navy Petroleum Reserve)로 지정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 소식에 들뜬 몇몇 시추업자들이 뛰어들었지만, 척박한 동토에서 얻은 것은 빈 구멍뿐이었습니다. 극한의 기후와 교통의 단절, 채산성 부족 등의 이유로 탐사는 곧 시들해졌습니다.
■ 스에즈 운하 봉쇄 이후 다시 뜨거워진 북극해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석유는 국제 전략상품으로 부상했고, 미국과 유럽, 일본의 석유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1956년 스에즈 운하 봉쇄 사건은 서방 국가들에 석유 공급의 불안정을 일깨웠고, 다시금 석유업계의 눈이 앨라스카로 향했습니다.
BP와 '싱클레어오일'이 합작으로 6개의 시추공을 뚫었지만 모두 실패했고, '걸프오일' 또한 철수했습니다. "석유가 터진다해도 채굴비용이 배럴당 5달러 이상은 들 것이다. 내 생애에 석유가 5달러 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철수한 석유회사 경영자의 말은 당시 국제유가가 배럴당 3달러였던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지요. 1966년 무렵, 알래스카 유정 시추의 실패 확률은 90%에 이른다고 여겨졌습니다.
■ 철학도의 집념이 터뜨린 북미 최대 유전
이때 한 오일맨이 등장합니다. "석유 사업은 90%가 헛탕이다. 쉽게 실망할 사람은 이 일을 해선 안 된다."라며, 그는 북극해 연안에서 내륙 100km로 시추 장비를 옮기고 탐사를 강행했습니다. 아코(ARCO) 석유회사의 최고경영자 로버트 앤더슨(1917~2007)이었습니다.
앤더슨은 시카고의 은행가 아들로 태어나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고 아리스토텔레스와 니체에 빠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장차 철학교수를 꿈꿨지만, 와일드캐터(석유 시추벤처기업가)들에게 자금을 대주는 아버지를 도우며 석유업계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정유업을 넘어 탐사 사업에 뛰어들었고, 기질과 직감을 발휘해 ARCO를 이끌었습니다.
1967년 12월 7일. 알래스카 툰드라의 혹한 속에서 시추 장비가 굉음을 내며 천연가스를 터뜨렸고, 마침내 북미 최대의 유전, 푸르도베이가 터졌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점보기가 서너 대가 한꺼번에 이륙하는 소리 같았다"고 회상했습니다. 이 순간이 알래스카의 운명을 바꿔놓았습니다.
■ 송유관이 없으면 석유도 없다
석유 발견은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가장 큰 과제는 이 원유를 어떻게 본토 소비처로 수송할 것인가였습니다. 해양은 겨울이면 얼어붙고, 내륙은 빙하와 산악지대가 가로막습니다. 항공 수송, 핵잠수함형 유조선 등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나왔지만, 현실적인 방안은 지상 송유관이었습니다.
두 가지 루트, 즉 알래스카 남부 발데즈 항구까지의 내륙 노선과 캐나다를 관통해서 시카고로 내려가는 노선이 검토되었고, 결국 미국 내에서만 행정절차를 밟을 수 있는 발데즈 노선이 선택됐습니다. 1970년, 석유회사들이 출자하여 알리에스카(Alyeska) 파이프라인 회사를 설립하고, 연방정부와 알래스카 주정부가 협력하는 형태로 공사가 추진되었습니다.
■ 환경운동과 원주민의 반발, 그리고 오일쇼크
그러나 공사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969년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 앞바다에서 발생한 석유 유출 사고(약 10만 배럴 규모)는 환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어 1970년에는 '지구의 날(Earth Day)'이 제정될 만큼 시민사회의 환경 감시가 거세졌습니다.
환경운동가들은 뜨거운 석유가 동토를 녹이고 생태계를 훼손할 것이라며 반발했고,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땅을 침범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따라 파이프라인은 주로 지상에 건설되었고, 동물들의 이동을 방해하지 않도록 파이프와 지면 사이에 1.5~2.4m의 공간을 두고, 순록이 많이 지나는 구간은 4.5m 이상의 높이로 설치되었습니다. 500개가 넘는 하천은 특수 제작된 교량이나 강바닥 관통 방식으로 설계되었습니다.
1973년 중동 오일쇼크가 터지자 여론은 급격히 반전되었습니다. 석유 안보가 우선이라는 명분 아래 연방 의회는 송유관 건설 관련법안을 신속히 통과시켰고, 1977년 알래스카 대송유관은 마침내 완공되었습니다. 앤더슨은 이 과정에서 연방정부와 의회를 설득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단순한 기업인이 아니라 국가 에너지 전략의 설계자로서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 알래스카의 미래, 다시 북극해를 향하다
송유관 건설로 알래스카 주정부는 막대한 경제적 혜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로열티와 세금 외에도 송유관 부지 사용료만으로도 매년 수억 달러의 수입이 발생하며, 이는 고스란히 영구기금으로 적립되고 있습니다.
푸르도베이 석유 발견 거의 60년이 된 지금,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다시 알래스카 천연가스 수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푸르도베이 일대는 최첨단 액화천연가스(LNG) 선박이 드나들고, 새로운 가스 송유관이 추가로 건설될 전망입니다. 하지만 기후위기 시대, 화석연료에 대한 세계적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미국 민주당정부는 알래스카 북부를 보호지대로 계속 묶어두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트럼프의 임기는 2029년 1월20일까지입니다. 트럼프 대통령 시기의 자원 개발 기조가 유지될지, 다시 민주당이 집권하여 환경보전 쪽으로 정책이 선회할지, 누구도 예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철학교수를 꿈꿨던 괴짜 오일맨이 얼어붙은 북극 동토에서 뚫어낸 '에너지의 심장'이 여전히 미국의 자원정책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점입니다. 로버트 앤더슨은 석유로 번 돈을 갖고 현대미술 수집가와 자선사업가로, 그리고 환경운동 지원가로 사회적 공헌을 다한 위대한 오일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