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재정 수입의 25%를 매년 적립해 영구기금마련…지난해 1인당 230만원씩 배당금 지급
알래스카경제 침체하자 21세기 들어 이 기금 전용 하자는 정치권 논의에 주민들 결사 반대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 알래스카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시원합니다. 미국의 한 주를 이루고 있는 알래스카는 면적이 약 172만㎢로 남한의 17배에 달하는 광대한 땅입니다. 그런데 인구는 약 70만 명으로 제주도 인구 규모입니다.
2024년 알래스카 주 정부는 1인당 1,702달러(한화 약 230만 원)를 배당금으로 지급했습니다. 만약 4명의 한국인 교포 이민 가족이 있다면 920만 원의 공짜 돈을 받은 셈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차별 없이 지급되는 이 돈은 가끔 정책적 화제로 떠오르는 '기본소득'과 부합하는 특징을 띠고 있어 많은 경제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민에게 매년 배당금을 줄 수 있는 재원은 바로 1968년 북극해 연안 푸르도베에서 유전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앞으로 수 차례에 걸쳐 20세기 미국 문명을 꽃피게 했던 미국의 석유밭(유전) 취재 여담을 다룰 것입니다. 1983년 가을부터 1987년 여름까지 한국일보 LA미주본사 기자로 근무하면서 여러 가지 취재 활동을 했습니다만, 그중 유독 관심을 끌었던 것이 미국의 유전이었습니다.
1970년대 초반에 터진 중동 오일쇼크는 기자의 일상에도 충격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월급이 30% 상승해도 치솟아 오르는 물가는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당시 국제 분쟁의 원인은 석유가 개입되었고, 미국의 언론은 석유 재벌들 이야기를 유별나게 많이 게재했습니다. 자동차를 갖고 사는 미국 생활 자체가 바로 석유 문제와 직결되었습니다.
서울을 출발하여 LA 국제공항에 내려 시내로 들어가다 보면 주택가나 빈터에 석유 펌프가 메뚜기 머리처럼 끄덕거리는 풍경이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북극해 유전으로 가는 길
미국의 유전 이야기를 알래스카 취재의 기억을 더듬는 것으로 시작해보려 합니다. 1986년, 현대차가 미국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여 신문사가 그 현대차를 타고 미국의 50개 주를 탐방하는 취재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내가 그 취재팀멤버로 선발되어 알래스카 취재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엑셀을 타고 캐나다 록키산맥을 뚫고 북극해까지 간다는 것은 위험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니 비행기로 갔다 오라는 회사의 지시에 따라 약 열흘에 걸쳐 알래스카를 여행했습니다.
처음에는 유전을 취재할 엄두를 못 냈으나 취재 소재를 모으는 과정에서 뜻밖의 귀인을 만났습니다. 앵커리지에 있는 알래스카 주립대학 경영학 교수 김춘근 박사와 인연이 닿았고, 그는 알래스카 석유 산업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제공해주었을 뿐 아니라 석유회사 아코(ARCO)와 접촉하여 북극해 연안의 푸르도베이 유전 탐방의 길을 터주었습니다.
▪빛이 꺼지지 않는 북쪽 마을
7월 중순, 앵커리지 비행장에 착륙했더니 김춘근 박사가 보낸 대학원생 김정화씨가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해외 취재를 더러 해봤지만 이런 고급스러운 여행은 처음이었습니다. 시계는 오후 9시가 넘었는데 해가 하늘에 떠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밤을 알리는 표시가 있었습니다. 모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켜 있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저녁 시간대를 알리는 표시로 자동차를 운전할 때 오후 6시가 되면 헤드라이트를 켜는 게 관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춘근 박사의 주선으로 교포 몇 명과 어울려 저녁을 먹으면서 교포들의 알래스카 생활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포들의 화제가 온통 석유값 걱정이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타블로이드 신문을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Oil Crisis'(석유위기)라는 대문짝만한 제목 아래 '석유가 8달러로 하락'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습니다. 석유값 하락이 알래스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해주는 교포들의 경험담을 듣고 나는 정말 석유밭 한가운데 들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텍사스 주를 취재하면서도 알게 됐지만 서울을 비롯한 세계의 대부분 대도시에서는 '오일위기=국제유가 폭등'으로 이해하지만, 석유 산지인 알래스카나 텍사스에서는 '오일 위기=유가폭락'을 의미하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 배당금이라는 이름의 기적
그날 밤 교포들의 대화중에 놀라운 화제는 주정부의 배당금 지급 얘기였습니다. 그들은 10월이 되면 주정부가 주민 1인에게 556달러씩 주게 된다며 기대에 차 있으면서도 석유 경기가 나빠서 매년 배당이 줄어들어 걱정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이 친척이 몇 달 전 한국에서 아이 둘을 데리고 이민 왔는데 그 가족에게도 배당금 통보가 왔다고 전했습니다.
교포들이 가장 많이 일하는 빌딩 청소는 저녁 6시부터 이튿날 새벽 2시까지 꼬박 일하고 월급이 1,300달러이니 배당금이 얼마나 큰 도움이 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 푸르도베이 유전 취재 여행을 의논하기 위해 김춘근 박사와 만난 자리에서 배당금 얘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1968년 북해 연안의 푸르도베이에서 유전이 터지면서 알래스카는 갑자기 부자 주가 되어 주 경제가 석유 위를 헤엄치게 됐습니다. 알래스카 주정부는 석유 회사가 생산하는 원유 생산량의 18%를 로열티 및 토지 사용료 명목으로 받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 정부 재정 수입의 85%가 석유 로열티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연방소득세는 내지만 주 소득세는 면제였습니다.
사람들이 흥청망청 심리에 빠져들 만할 때, 알래스카의 정부 및 의회 지도자들은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석유는 언젠가 고갈될 것이다. 그때 우리 후손들은 무얼 먹고 사느냐는 문제의식에 눈을 크게 떴습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지속가능한 영구적 기금(Permanent Fund)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석유 및 광물 자원에서 거둬들이는 주 재정 수입의 25%를 매년 적립하고, 그 원금은 오직 투자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주 헌법을 개정하였습니다.
매년 주정부가 광물 자원 로열티로 거둬들이는 수입의 25%가 이 기금에 추가되고, 또 투자 수익 중에서 주민 배당에 쓴 나머지 돈은 영구기금에 편입되기 때문에 이 기금은 이론상 줄어들 수 없습니다. 주민에게 해마다 지급하는 배당금은 바로 영구기금의 투자 수익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취재여행을 갔던 1986년 당시 영구기금 규모는 76억 달러였습니다. 한때 알래스카 경제가 침체되면서 21세기에 들어 이 기금을 일반재정으로 전용하자는 논의가 정치권에서 벌어진 적이 있지만 주민들은 이런 움직임에 노(No)라고 답했습니다. 재정이 모자라 쩔쩔매면서도 금고에 쌓아놓은 큰돈을 쓰지 못하는 것은 알래스카의 아이러니이지만, 동토(Permafrost)에 적응하며 살아온 알래스카인들의 지혜로운 선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24년 현재, 알래스카 영구기금의 규모는 831억 달러에 이릅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본소득 정책을 고민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 역시 알래스카의 영구기금 제도에서 시사점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