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가 좋으니 좋은인력 모였지만 결혼하면 아내들이 공장만 있는 곳 살기 싫어해
경기도 용인 마북리에 둥지를 틀면서 엔진개발 본궤도에 올라 국산엔진 꿈 영글어

그렇게 자동차를 지킨 정 회장은 진짜로 엔진 개발에 정성을 들였다. 중동 건설로 번 돈을 여기에 다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현대가 포니를 개발할 때 일본 미쓰비시 엔진을 사서 썼다. 그것도 거의 구걸하다시피 해서 겨우 얻었다. 1,800cc, 2,000cc 엔진도 미쓰비시에 돈 주고 샀다. 하나하나 들여올 때마다 다 돈이었다. 당연히 아까웠다.
정 회장은 자동차 엔진 얘기만 하면 매우 답답해했다. 현대자동차 임원들에게 "엔진 개발해봐"소리를 쉴 새 없이 했다.
"어느 엔진이 제일 좋아?"
"도요타입니다."
"그럼 도요타 엔진하나 사다가 베끼면 되잖아. 내가 하나 구해 줄 게 해봐."
"못합니다. 설계할 사람도 없고, 엔진 기술자도 없습니다."
정 회장이 '못합니다' 소리를 제일 싫어하는 줄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울산 현대자동차에 엔진 연구소를 만들고, 전국의 인재들을 끌어모았다. 정 회장은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대우가 좋으니 유능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하던 인재들이 줄줄이 퇴사했다. 퇴사 이유가 '결혼'이었다.
"결혼하고 여기서 살면 되지 퇴사를 왜 해?"
"아내 될 사람이 울산에서는 살기 싫답니다."
이른바 '울산 핸디캡'이었다. 회사에서만 잘해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80년대 울산에는 공장밖에 없었다. 문화시설이나 백화점, 위락시설 등이 아예 없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경쟁사인 기아자동차와 대우자동차는 수도권에 공장이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인재를 뺏겼다.
정 회장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그럼 미국에서 사람 데려와."
"울산까지 내려온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거참. 그럼 서울에 연구소 만들어 주면 되겠어?"
그렇게 해서 경기도 용인 기흥읍 마북리에 마북 연구소가 만들어졌다. 비록 서울은 아니었지만, 여기만 해도 감지덕지했다.
마북 연구소가 완공되던 날, 정 회장이 말했다.
"자, 이제 시작해 봐."
그때부터 본격적인 자동차 엔진 연구가 시작됐다. 91년 5월, 드디어 처음으로 독자 개발한 엔진이 나왔다. '알파 엔진'으로 명명된 이 엔진은 처음에 현대 스쿠프에 탑재됐다. 이후 94년에 뉴 알 파 엔진이 나왔고, 엑센트에 탑재됐다.
엑센트야말로 디자인부터 설계, 엔진에 이르기까지 우리 손으로 만든, 진정한 고유모델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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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한일보와 합동 통신사를 거쳐 중앙일보 체육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4년 LA 올림픽, 86 서울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 베이징아시안게임, 92 바르셀로나올림픽, 96 애틀랜타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체육기자 생활을 끝낸 뒤에도 삼성 스포츠단 상무와 명지대 체육부장 등 계속 체육계에서 일했다. 고려대 체육언론인회 회장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