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6 07:50 (수)
[김성희의 역사갈피] 美여성인권, 뜻밖 입법이 '물꼬'
[김성희의 역사갈피] 美여성인권, 뜻밖 입법이 '물꼬'
  •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 jaejae99@hanmail.net
  • 승인 2024.09.30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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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고령 하원의원의 '꼼수 발의'가 덜컥 통과되는 바람에 '성평등' 법적 보장 받아
당초 부결시킬 요량으로 '인종ㆍ피부색ㆍ종교ㆍ원국적'관계없는 평등안에 '성'(性)추가
1960년대 미국에선 민권운동의 열풍이 드셌다/이코노텔링그래픽팀.

오는 11월 미국의 제4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경쟁이 팽팽한 모양이다. 도널드 트럼프야 그렇다 치더라도 뒤늦게 뛰어든 카멀라 해리스 후보의 선전이 눈부시다. 한때 유력한 대통령후보로 거론됐던 힐러리 클린턴, 미셸 오바마의 꿈을 이뤄낼지 자못 궁금하다. 그런데 여성이 이렇게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대권 경쟁에 나서게 된 그 뿌리는 의외로 엉뚱하다.

1960년대 미국에선 민권운동의 열풍이 드셌다. 1961년 제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존 F. 케네디는 이 같은 흐름을 타고 취임 직후 여성지위위원회를 만들고 당시 70줄에 들어선 엘리너 루스벨트를 위원장으로 영입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부인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됐을 만큼 국민적 신망을 얻었던 거물이었다.

1963년에는 베티 프리던의 『여성의 신비』가 잠시 주춤하던 여권운동에 다시 불을 지폈다. 세계대전 후 참전군인들이 귀향하면서 여성들에게는 다시 가사노동이나 기껏해서 교사·비서 등 '여성에게 알맞은' 직업에만 사회활동이 한정되던 시절이었다. 이런 여성들에게 '이게 전부인가'라는 질문을 자각하게 해준 베티 프리던의 책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 『정글』, 『킨제이 보고서』 등과 더불어 미국을 뒤흔든 책으로 꼽힐 정도다.

그런데 여성의 사회활동에 제대로 물꼬를 튼 것은 노정객의 엉뚱한 입법이었다. 1964년 남부 버지니아 출신의 81세 하원의원 하워드 스미스가 민권법안을 부결시킬 목적으로 개정법안을 제출했다. "인종, 피부색, 종교 또는 원국적"과 관계없이 인권이 보호된다고 규정한 원 법안에 그 대상에 '성(性)'을 추가한 내용이었다. 남녀동등권을 보장하는 법안에는 어느 의원도 찬성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서 나온 '꼼수'였는데 실제 동료 의원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기까지 했다.

한데, 이 개정법안이 덜컥 통과되면서 이제는 흑인뿐 아니라 여성의 권리도 백인, 남성과 동등하게 보호받게 되었다. 여성들이 곧 청원서를 들고 고용기회평등위원회로 몰려들었으니 하워드 스미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평등위원회 위원장이 뒤늦게 "이 법은 서출(庶出)로 태어난 것이지 남녀차별을 배척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불평했지만 이 법은 적어도 미국에서 여성의 인권을 높이고 사회활동을 돕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일화를 소개한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미국의 역사』(고려원미디어)를 쓴 언론인 케네스 C. 데이비스는 "인디라 간디, 골다 마이어, 마거릿 대처 같은 강력한 여성 지도자들이 어느 남성 지도자 못지않게…미국에서는 여성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가능성이 희박한 일로 여겨지고 있다"고 촌평했다. 1990년 출간된 책이니 이제 와서 보면 불과 반 세기 뒤 일도 내다보지 못한 셈이다.

어쨌거나 역사가 의도하지 않은 사건, 인물로 인해 요동친 한 사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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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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