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침입때 옹진성 지켜'백마장군'으로 불려…화산성에 망국단 세워 고향 그려
한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해외여행지로 베트남의 푸꾸옥이 꼽혔다는 뉴스가 얼마전 나왔다. 과거사야 어쨌든 그만큼 베트남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다는 의미겠다. 그런데 베트남의 사라진 왕조의 일족이 한반도에 와서 한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우리 역사, 세계와 通하다』(KBS 역사스페셜 제작팀 지음, 가디언)에는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렸다.
11세기 베트남에서 리꽁우언(李公蘊)이란 인물이 대구월大瞿越국을 세운다. 이후 9대 216년간 권세를 잡은 리 왕조는 베트남 최초의 장기 집권 왕조로 꼽힌다. 리 왕조는 탕롱(현 하노이)으로 천도하고, 왕은 스스로 '남제(南帝)'라 칭하며 북송을 공격하는 등 중국과 대등한 위상을 자랑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리 왕조는 1225년 내분으로 왕은 폐출되고, 왕족은 몰살된다. 이 와중에 6대 임금 영종의 일곱 번째 아들 이용상(李龍祥)이 가족을 이끌고 탈출하여 중국 산둥반도를 거쳐 1226년 황해도 옹진반도의 화산으로 도피한다. 일종의 망명이었다. 당시 고려국의 고종은 그의 처지를 가련히 여겨 식읍을 하사하고,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했다. 화산 이씨의 시조다.
이용상은 무용이 뛰어났던지 1253년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민관군을 지휘하며 옹진성을 다섯 달 이상 지켜냈다. 이 과정에서 수백 명 이상의 몽골군을 포로로 잡는 등 빛나는 전과를 올려 '백마장군'으로 불리기도 했단다. 이에 고종은 이용상의 관직을 높이고 화산 지방 30리 인근의 식읍 2천 호를 하사하며 치하했다고 한다. 더불어 조상의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제수를 많이 내리고 화산관에 수항문(受降門)이란 글자를 써 주었다. 이는 이용상의 망명 및 귀화 사실을 기록한 수항문 기적비에 따른 것이다.
이후 이용상은 화산성에 망국단을 쌓고 고국을 그리다 생애를 마쳤는데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화산을 본관으로 정했으니 화산 이씨의 시작이다. 한편 그의 아들들도 높은 벼슬을 사는 등 일가가 번성했는데 이용상의 둘째 아들 이일청은 안동부사를 지내고 안동에 정착했다. 그러니 이용상의 14세 손인 이장발(李長發·1574~1592)을 기리는 정자 충효당이 경상북도 봉화에 있는 것도 이해가 간다. 이장발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에 종군하여 문경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나이 불과 열아홉 살, 3대 독자이자 혼인한 지 3개월밖에 안 된 새신랑이었다. '충효당'은 그의 재주와 의기를 높이 산 후인들이 붙인 것이라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흔히 '한겨레' '배달민족'이라 해서 순수 혈통을 고집하는 것이 어째 오글거리지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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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