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1 14:20 (화)
[독점연재] 정주영 히스토리 (49) '금강산 관광'의 태동
[독점연재] 정주영 히스토리 (49) '금강산 관광'의 태동
  • 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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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4.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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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권재수에 실패하자 낙담한 정주영 회장, 1997년 가을 '회심의 결단'
정몽헌 회장, 이익치 사장 호출해 "금강산 관광은 평화통일의 첫 단추"
대북사업 마음에 뒀는데 '김영삼-김일성'정상회담 불발되자 아쉬워해

1997년 가을, 또다시 대선에 출마하려던 정 회장의 꿈은 무산됐다.

실의에 빠져있던 정 회장이 정몽헌 회장과 이익치 사장을 사무실로 불렀다. 정 회장의 입술이 일자로 굳어져 있었다. 무언가 결심이 서면 어금니를 꽉 깨무는 게 정 회장의 특징이었다. 입술 모양만 봐도 '또 결심한 게 있구나'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어. 내 고향이 금강산 아니냐?" 금강산 얘기를 꺼낼 때 정 회장의 눈빛이 빛났다.

"대북 사업을 재개하자. 금강산 관광 한 번 해보자." "금강산 관광이요?"

"그래. 금강산 관광. 나는 그게 남북 전쟁 위협도 막고 평화통일로 갈 수 있는 첫 번째 단추라고 생각해. 금강산 관광이 이뤄지면 남한 사람들도 좋고, 북한에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정주영 회장의 대북 사업은 89년 1월 첫 북한 방문 때 이미 싹 텄다. 정 회장은 당시 북한의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장 초청으로 남한 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방북했다. 사진=현대자동차그룹.
정주영 회장의 대북 사업은 89년 1월 첫 북한 방문 때 이미 싹 텄다. 정 회장은 당시 북한의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장 초청으로 남한 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방북했다. 사진=정주영 회장 청년 시절 모습ㆍ현대자동차그룹.

정주영 회장의 대북 사업은 89년 1월 첫 북한 방문 때 이미 싹 텄다. 정 회장은 당시 북한의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장 초청으로 남한 기업인으로는 처음 방북했다. 김윤규 당시 현대건설 상무 등 측근 3명만 수행했다. 남한에서 북한에 가려면 중국을 거쳐서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베이징 북한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 북한 땅에 들어갔다. 9일간 북한을 돌아본 정 회장은 금강산 및 인근 지역 공동개발, 시베리아 경제개발 계획 공동참여 등을 북측과 합의했다.

이후 남북 고위급 회담(90년), 남북 통일축구대회(90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 단일팀 참가(91년), 세계 청소년축구대회 남북 단일팀 출전(91년), 남북 동시 유엔 가입(91년), 남북 기본합의서 합의(92년) 등 화해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정 회장의 재방북 계획은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노 대통령은 북방정책을 강하게 추진하면서도 정 회장이 북한과 밀착되는 것은 경계했다.

다음 김영삼 대통령은 대선에서 자신과 맞붙었던 정 회장과 현대를 압박하는 통에 재방북은 꿈도 꾸지 못했다.

93년 북핵 위기에 이어 94년 전쟁 발발 가능성까지 나오면서 남북 관계는 급속하게 냉각됐다. 북핵 위기는 국제원자력기구가 북한의 핵 개발 의혹을 제기하며 불거졌다. 원자력 기구는 북한에 특별사찰을 받을 것을 요구했다. 6차례에 걸친 사찰 결과 북한 보고서에 있는 플루토늄의 양과 실제가 다르게 나타났다.

북한은 사찰을 거부했고, 한국과 미국은 중단했던 팀 스피리트(Team Spirit) 훈련을 재개했다. 그러자 북한은 핵확산방지조약(NPT)을 탈퇴한 뒤 핵실험과 탄도미사일인 노동 1호 발사를 강행했다.

94년 3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특사 교환 실무회담에서 북한 대표 박영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국장은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이 불바다가 된다"라고 협박해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클린턴 미 대통령은 동해에 항공모함 5척을 보내 북한의 핵시설만 제거하는 '외과수술식 정밀 폭격'을 준비했다. 이 정보를 듣고 깜짝 놀란 김영삼 대통령이 클린턴에게 전화해서 "그렇게 한다면 한반도 전쟁은 불가피하다"며 공습 계획을 막았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구원투수로 나선 사람이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었다. 카터는 94년 5월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성 주석과 협상을 진행했다. 카터와 김일성은 이 협상을 통해 국제사찰단 조사 허용과 비무장지대에 전진 배치된 군대 철수를 합의하는 동시에 남북 정상회담 개최라는 대어를 낚았다.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만남은 국제적으로도 큰 이슈였다. 협의를 거쳐 역사적인 첫 만남 날짜가 94년 7월 25일로 정해졌다. 그런데 정상회담을 불과 보름 앞둔 7월 8일 '김일성 주석 사망'이라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모든 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정 회장도 이때가 가장 아쉬웠다고 했다.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의 정상회담이 성사됐으나 김일성과 김정일의 무게감 차이를 생각하면 94년 정상회담이 불발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아깝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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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한일보와 합동 통신사를 거쳐 중앙일보 체육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4년 LA 올림픽, 86 서울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 베이징아시안게임, 92 바르셀로나올림픽, 96 애틀랜타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체육기자 생활을 끝낸 뒤에도 삼성 스포츠단 상무와 명지대 체육부장 등 계속 체육계에서 일했다. 고려대 체육언론인회 회장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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