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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이 엮은 인류경제사] (25) 샤넬의 '100년'
[패션이 엮은 인류경제사] (25) 샤넬의 '100년'
  • 송명견(동덕여대 명예교수ㆍ칼럼니스트)
  • mksongmk@naver.com
  • 승인 2023.12.14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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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가정 환경 딛고 빈손으로 창업 의지 불태운 ' 열정과 혁신 '이 성공의 씨앗
꽃잎과 레이스로 복잡하게 꾸며졌던 '거추장스런 모양'의 모자서 벗어나 첫 대박
1913년 휴양 도시 도빌에 '샤넬' 브랜드의 첫 부티크 내 남성 디자이너 벽 허물어
옷에 포켓 다는등 기능적인 차별화된 옷들은 고가임에도 상류계층의 필수템으로

프랑스 브랜드 샤넬이 세계적 명품으로 올라선 데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한 여성의 불굴의 도전과 혁신이 있었다.

1883년 프랑스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가브리엘 샤넬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에게도 버림받아 수녀원에서 성장했다. 18세에 고아원에서 나온 그녀는, 낮에는 시골 모자점에서 보조 봉재사로 일하고, 밤에는 카바레에서 노래를 불렀다. 밤낮으로 일했지만 가난과 주변의 냉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 어린 그녀에게 "돈이 있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성공에 대한 열망과 부(富)에 대한 집착이 강해졌다.

프랑스 브랜드 샤넬이 세계적 명품으로 올라선 데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한 여성의 불굴의 도전과 혁신이 있었다. 사진(1929년 파리 깡봉가 31번지 샤넬 부티크(왼쪽), 1936년 코코 샤넬(오른쪽))=샤넬/이코노텔링그래픽팀.

샤넬의 첫 번째 도전은 27살 때 모자로 시작됐다. 당시 여성들로선 이루기 어려운 꿈이었던 자신의 모자점을 내는 일이었다. 그녀를 사랑한 상류층 남성의 도움을 받아 이를 과감히 해냈다. 그 무렵 여성 모자는 꽃잎과 레이스 등으로 복잡하게 꾸미고, 매우 커서 거추장스러운 모양이었다.

샤넬은 과감하게 작고 단순하며 활동적이고 우아하기까지 한 모자를 선보였다. 그녀가 만든 모자들은 빠르게 입소문을 타고 상류층 여성은 물론 배우들에게 전파됐다.

첫 번째 혁신인 모자가 인기를 끌자 의상 디자이너로서의 꿈이 꿈틀거렸다. 당시 세계 패션의 중심지인 파리는 남성 디자이너들이 이끌고 있었다. 패션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한데다 연약한 여성이 도전하기에는 너무 높은 벽이었다. 그러나 이 장벽도 그녀를 사랑하던 남성의 도움으로 휴양도시 도빌에 '샤넬' 브랜드로 첫 부티크를 열면서 넘어섰다. 1913년 나이 30살 때였다.

1913년 도빌에 있는 자신의 부티크 앞에 있는 가브리엘 샤넬. 사진=샤넬.<br>
1913년 도빌에 있는 자신의 부티크 앞에 있는 가브리엘 샤넬. 사진=샤넬.

이 무렵 유럽은 기능주의가 팽배했다. 게다가 세계 1차대전으로 전쟁터에 나간 남성들이 하던 일을 여성들이 해야 했으므로 여성의 사회 활동이 요구되는 시기였다. 이런 사회 분위기와 달리 여성들은 허리둘레 18인치를 이상으로 생각하며 코르셋으로 몸을 조이고, 땅에 끌리는 긴 치마에 온갖 장식을 붙이고, 무릎 아래를 좁혀 걷기도 힘든 스타일의 옷을 즐겨 입었다.

그러나 샤넬은 여성을 부르는 시대 흐름을 읽었고, 과감하게 패션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먼저, 땅에 끌리던 치마 길이를 짧게 잘라냈다. 이른바 '샤넬 라인(무릎 아래 5~10cm 스커트 길이)'의 탄생이었다. 이 라인은 1960년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누구에게나 잘 어울리는 스커트 길이로 정착하면서 디자이너 샤넬의 천재성을 재확인시켰다.

샤넬은 나아가 여성들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가히 '패션 혁명'이었다. 샤넬의 도전과 혁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남성의 속옷 재료로 사용하던 얇고 가벼운 저지(Jersey)로 투피스를 만들었다. 남성 패션에만 사용하던 검정색으로 '리틀 블랙 드레스'도 내놓았다. 특히 이 드레스는 당시 인기가 대단했던 미국 포드 자동차를 빗대어 '샤넬 포드'라고 불렸다.

이밖에도 처음으로 옷에 포켓을 다는 등 기능적이고 철저히 차별화된 옷들을 선보였다. 그야말로 당대의 기능주의가 옷에 그대로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1915년 당시 샤넬의 옷 한 벌 값이 약 7000 프랑(현재 가치로 약 500만원)으로 비쌌지만, 샤넬의 옷이 없으면 상류계층에 낄 수 없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새롭고 실용적이면서도 심플하고 세련미까지 겸비한 그녀의 옷은 여성 해방의 아이콘이 되었고, 샤넬은 성공 가도를 질주했다. 모자 혁명에 이은 두 번째 패션 혁명도 거뜬히 성공시켰다. 그리고 그녀는 어느새 거부(巨富)가 되어 있었다.

1945년 깡봉가 31번지 부티크 앞에서 N°5 향수를 구매하기 위해 줄지어 늘어선 미국 군인들. 사진=샤넬.<br>
1945년 깡봉가 31번지 부티크 앞에서 N°5 향수를 구매하기 위해 줄지어 늘어선 미국 군인들. 사진=샤넬.

1921년 향수 '샤넬 N°5'를 출시해 다시 한 번 대박을 쳤다. 목욕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에 쉽게 사라지는 천연 향수와 달리 향기가 오래 지속되는 향수의 출현도 예견된 성공이었다. 이어 기다란 끈으로 어깨에 메는 최초의 독창적인 핸드백(Quilting shoulder bag)을 내놓았다.

손을 자유롭게 만들어준 이 백도 시대의 요구에 딱 들어맞는 성공 아이템이었다. 샤넬이 과감하게 도전한 일련의 혁신 제품들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다. 샤넬은 1930년대 초 미국으로 진출하여 할리우드 배우들의 의상을 맡았다. 이어 1930년대 중반에는 4000명 일군을 거느리고 1년에 2만8000여벌의 옷을 만들어내는 큰 사업체의 최고경영자(CEO)가 되었다.

성장 가도를 달리던 샤넬에게도 시련이 닥쳤다. 세계 2차대전 와중에 독일 스파이로 의심받아 파리 패션계를 떠나야만 했다. 15년 만인 1954년, 71세의 나이로 패션계에 복귀했다. 고령의 나이에도 시대에 맞게 실용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세계를 다시 열광시켰다. 1957년에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에게 주는 '패션 오스카'상을 받았다. 또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하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유일한 패션 디자이너로 꼽혔다.

샤넬 브랜드의 기업가치는 1000억 유로(약 140조원, 2019년 기준)에 이르고, 매해 24조원이상의 매출을 올린다. 국내에서도 2022년 매출 1조5913억원으로 전년 대비 30% 성장했다. 영업이익은 4129억원으로 전년 대비 66% 증가했다.

샤넬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 신화를 이어가며 100여 년 동안 세계 최고 패션 기업 왕좌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 성공의 비결은 무엇일까. 한 여성 디자이너의 성공을 넘어선 '인간 승리'는 시대 변화의 흐름을 앞서 파악하고 과감하게 차별화를 실현한 데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 패션산업이 내리막길을 걷는 지금, 샤넬의 도전정신과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새겨볼 필요가 절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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