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2 04:05 (수)
[김성희의 역사갈피] '면죄부'의 불편한 진실
[김성희의 역사갈피] '면죄부'의 불편한 진실
  •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 jaejae99@hanmail.net
  • 승인 2023.07.2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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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후반 英 수도원장이 전소된 수도원 재건에 돈이나 노동기부 받으려 면죄부 발행
현세의 죄로 받은 벌 3분의 1 경감하는 증명서 만들어…나중엔 교황도 인정한 면죄부도
15세기 인쇄술 발달로 대량 발행이 가능해져 남발되자 독일선 그 반발로 종교개혁 촉발
면죄부 판매는 사회기반시설 프로젝트, 문화와 예술 분야 지원, 가난한 사람들 구제 등을 위해 유용하게 쓰였다/이코노텔링그래픽팀.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 특정 목적을 위해 일반 다중으로부터 투자 자금 따위를 모으는 방식이다.

최근 집중 수해로 인해 '오송 참사'가 빚어지면서 수재민들을 위한 국민 성금이 수십억 원에 이른다는 소식을 듣고 떠오른 말이다.

사회적 부조를 위해 여러 사람이 뜻을 모았다는 점에서, 약간 결이 다르긴 하지만 일종의 '크라우드 펀딩'이란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리라.

한데 세계사를 뒤져보면 크라우드 펀딩은 일찌감치 시작되었단다. 적어도 『미래가 있던 자리』(아네테 케넬 지음, 지식의 날개)에 따르면 그렇다. 중세 유럽을 살았던 이들에게서 공유경제, 리사이클링 등 21세기 사회의 시스템의 뿌리를 찾은 이 책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제공한다.

10세기 후반 영국의 수도원장이었던 크롤랜드의 고프레두스는 불에 타버린 수도원을 재건하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기부금, 노동, 건자재 제공 등 수도원 재건에 기여한 이들에게 현세의 죄로 받은 벌의 3분의 1을 면해주는 증명서를 발행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영국 주교들에게 수도원 재건축을 위한 면죄부-책에선 면벌부라 했다-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해서 허락을 받았다.

고프레두스의 수도승들은 영국은 물론 덴마크, 노르웨이까지 가서 주교가 증명한, 그리고 나중에는 교황도 인정한 면죄부를 팔아 수도원 재건축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면죄부 판매는 사회기반시설 프로젝트, 문화와 예술 분야 지원, 가난한 사람들 구제 등을 위해 유용하게 쓰였다. 심지어 지은이는 면죄부가 없었다면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도 없었으리라고 주장한다.

그런 면죄부는 두 가지 전제 위에 성립했다. 하나는 사람들이 일생 동안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기도와 선한 행동으로 그 죄를 덜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특히 후자는 갈수록 '발전'해 12세기에 이르면 참회 행위의 '양도 가능성'마저 생겨나 면죄부의 효과는 사후에도 참회해야 할 죄를 그 후손들이 갚을 수 있는 데까지 확장되었다.

면죄부의 명목도 다양해져서 독일에서는 '버터 식용 허가증'이라 할 유제품 면죄부까지 등장했다. 중세 유럽의 가톨릭 교도들은 부활절 전 40일 동안, 즉 사순절에는 고기뿐 아니라 달걀, 우유 제품까지 먹지 못하고 채식을 해야 했는데 이 유제품 면죄부를 사면 금식 기간에 우유와 달걀이 들어간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러나 유가증권처럼 시중에서 유통될 정도에 이르렀던 면죄부는 15세기 인쇄술 발명 덕분에 대량 발행이 가능해지면서 과잉 발행되었으며 독일에선 그 반발로 프로테스탄트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공익 프로젝트를 위한 재정 지원은 새로 등장한 복권의 역할로 넘겨졌다. 면죄부 하면 흔히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던, 가톨릭 부패의 상징으로 알기 쉽지만 여기에는 또다른 진실이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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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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