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한 언론이 '현대 지원으로 회사컸다"보도하자 "광고 주지말라"불호령
정상영 KCC그룹 명예회장은 첫 현대그룹에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주영 창업주은 대학 졸업을 앞둔 정 명예회장에게 유학을 권유했는데 이를 뿌리치고 창업을 해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6형제중 막내지만 자신이 회사를 만들어 30대그룹을 일군 자부심이 그래서 강하다. 세월이 흘러 현대家의 맏어른이 됐다. 집안 일이라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다. 조카들이 소유한 회사의 경영방어에도 누구보다도 앞장선다. 정상영 명예회장의 이야기를 두차례 나눠 싣는다<편집자 주>
정상영(83) KCC그룹 명예회장은 1958년 창업 후 61년에 걸쳐 KCC를 재계 30대 그룹으로 키워낸 역량 있는 기업인이다. 그는 사업 내내 곁눈을 팔지 않고 건자재 관련 사업에만 몰두해 KCC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낸 인물이다. 올해 5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대기업집단(자산총액 10조원 이상) 지정 결과에 따르면 KCC그룹은 재계 순위 34위(작년 29위)였다. 계열사 15개(작년 17개)에 자산총액 10조4000억원(작년 11조원)을 각각 기록했다.
주지하다시피 정상영은 고(故) 정주영 현대 창업자의 막내 동생이다. 7명(6남 1녀)의 형제자매 중 정주영은 장남이며, 정상영은 막내다. 다른 형제나 2세들 대부분이 정주영으로부터 크든 작든 회사를 분할 받아 독립한 것과는 달리 그는 애초부터 독자 사업에 나서 오늘날의 KCC를 일궈냈다. 그 점에서 정상영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정상영이 평소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은 “정주영 형님 덕에 KCC그룹을 일구었다”는 말이다. 성격이 털털하고 호방한 그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누구 앞에서나 “사실이 아니다”라며 역정을 낸다. 1980년대 어느 날 취재하러 갔던 필자 앞에서도 그는 자신의 속을 여과 없이 드러낸 적이 있다. 어느 매체가 정주영 덕에 회사를 키웠다는 식의 보도를 한 걸 접하고선 “앞으로 엉터리 보도를 한 그런 회사에는 광고를 주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것.
61년 전인 1958년 8월 12일, 22살이었던 그는 직원 7명과 생산 설비 1대로 서울 영등포에서 금강스레트공업을 창업했다(1976년 금강으로 상호 변경). 오늘날 KCC그룹의 모체가 된 이 회사는 슬레이트 업체였다. 이어 1974년 페인트업체인 고려화학을 세웠고, 1989년 6월엔 건설사업 부문을 떼어내 금강종합건설을 설립했다. 같은 해 8월 금강레저, 1990년 고려시리카, 1996년 금강화학을 잇달아 세웠다. 2000년엔 금강과 고려화학을 합병해 상호를 금강고려화학으로 바꿨다(2005년 2월 KCC로 다시 개명). 2001년 프로농구단 KCC이지스를 창단하기도 했다.
계열사가 15개를 오르내렸지만 핵심 사업은 유·무기 건자재 사업이다. KCC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제품군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도료, 유리, 창호, 바닥재, 내외장재, 보온단열재, 접착제, 실리콘 등이다. 주력사인 KCC(종전 금강과 고려화학 합병회사)와 KCC건설 등이 모두 건자재와 관련이 있다.
정상영은 2000년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이후 세 아들에 대한 경영권 승계 작업을 차곡차곡 진행해 나가고 있다. 그룹 경영 총괄은 장남 정몽진(59) 회장, KCC 경영은 2남 정몽익(57) 사장, KCC건설 경영은 3남 정몽열(55) 사장이 각각 맡는 ‘2세 경영 체제’를 구축했고 완전한 경영권 이양도 멀지 않아 보인다.
지난 7월 KCC는 공시를 통해 새해 1월 1일 가칭 ‘케이씨지’란 회사를 세우고 유리와 홈씨씨, 상재 사업부문을 분할해 넘기겠다고 발표했다. 재계는 정상영이 2남 정몽익에게 이 사업부문을 넘겨 세 아들 간 사업 구획 정리에 본격 나설 것으로 풀이한다. 맏형 정주영 사후 현대 계열사 분할 문제를 놓고 2세들 사이에 심한 다툼이 있었던 것을 목격했던 그는 세 아들에 대한 사업 분할 승계 문제에 미리부터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어 보인다. -정상영KCC명예회장㊦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