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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의 역사갈피] 대한제국의 '근대화 소리'
[김성희의 역사갈피] 대한제국의 '근대화 소리'
  •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 jaejae99@hanmail.net
  • 승인 2023.02.27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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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양성소인 외국어 학당 학생들이 고종 앞에서 구령에 따라 체조
흡족한 고종은 학생들에게 부채 선물 하자 학생들은 만세3창으로 화답
1938년 개성 송도중 학생들은 '황성요배' 때 고개 숙인 채로 야유 합창
1896년 6월 25일 『독립신문』에는, 지금 보면 희한한 내용이 실렸다. 고종 황제 앞에서 남학생들이 요상스런 '춤'을 췄다는 전언이었다. 사진(고종 황제)=서울역사박물관/이코노텔링그래픽팀.

1896년 6월 25일 『독립신문』에는, 지금 보면 희한한 내용이 실렸다. 고종 황제 앞에서 남학생들이 요상스런 '춤'을 췄다는 전언이었다. 전말은 이랬다.

당시 엘리트 양성소인 외국어학당 학생들이 자신들이 배운 근대 개명 교육을 시연하는 자리였다. 학생들은 외국어 능력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 갑자기 줄을 맞춰 서더니 어설픈 율동을 선보였다. 양반가 자제들이 군주 앞에서 춤을 추다니 당시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인즉 이들은 춤이 아니라 근대 체조를 보인 것이었다. 국운이 위태로우지면서 상무정신이 강조되던 시절이었다. 호각 소리나 "하낫 둘 하낫 둘" 구령에 맞춰 절도 있는 동작을 취하는 체조는 군대의 제식 행렬을 연상케 해 인기를 끌었다. 60년대만 해도 아침이면 라디오에서 국민체조 음악이 흘러나왔고, '국민학교' 운동회는 으레 학생들의 단체 체조로 시작했던 풍경에는 다 유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날 남학생들의 기이한 춤을 본 고종의 반응은 어땠을까. 고종은 크게 만족해서 학생들에게 부채를 하사하며 격려했고, 학생들은 만세삼창으로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체조의 구령 소리와 더불어 문명개화를 상징한 또 다른 소리가 학교의 종소리였다. "학교 종이 땡땡땡~"하는 동요도 있지만 서양식 학교의 등교를 재촉하고,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소리는 앞선 서구 문명의 초대장처럼 들렸으리라.

퇴출된 종소리도 있었다. 서울 종각에서 울렸던 종소리 대신 오포(午砲) 소리가 정오를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08년의 일이다. 그나마 매일 울리던 오포 소리는 1922년 군비축소 정책에 따라 사이렌으로 바뀌었다.

체조 구령 소리와 사이렌이 주는 느낌은 다르다. 전자는 절도와 기개를 상징한다면 후자는 위험과 경계를 재촉하는 느낌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80년대 민방위 훈련을 하면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차에서 내려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이해가 갈 것이다.

당연히 사이렌에 대한 저항도 있었다. 1938년 개성 송도중학교에서 있는 '송고(松高) 사이렌 사건'이 대표적이다. 황국신민화 정책에 따라 매일 아침 운동장에 모여 '황성요배'을 시행하던 시절. 이날 교련 교관의 구령에 맞춰 인사를 해야 할 학생들은 고개를 숙인 채 입으로 '우~우~'하는 사이렌 소리를 냈다. 교관이 칼을 빼 들고 휘두르기까지 했지만 송고 학생들은 멈추지 않았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천황에 대해 일종의 '돌려치기'였다.

소리를 중심으로 근대화를 포착해낸 『소리가 만들어낸 근대의 풍경』(이승원 지음, 살림)에 실린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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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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