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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연재] 정주영 히스토리 ③ 정주영 회장의 청운동 자택 무시 출입
[독점연재] 정주영 히스토리 ③ 정주영 회장의 청운동 자택 무시 출입
  • 이코노텔링 이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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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4.0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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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집가게 할머니는 정 회장과 변중석 여사와 관계 좋아 '특권' 누려
정주영 회장은 자전거 탈 줄 모르면서 '자건거 배달' 나섰다가 곤욕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정주영 정신 ' 이봐 해봤어 '는 그 때 잉태

할머니는 장손인 나와 증손자인 내 아들을 모두 끔찍하게 사랑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30분 거리 인 학교까지 따뜻한 점심 도시락을 손수 갖다주셨다. 1년간 계속 된 할머니의 '도시락 셔틀'은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우리 내외가 맞벌이할 때는 증손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 지 7년간 업어 키우는 등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셨다. 증손자는 증조할머니의 음덕으로 현재 부부가 대학교수로 잘 지내고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묘비에 「여기 자식들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하신 차소둑 할머니 잠드시다」라고 썼다.

이같이 자애로운 할머니는 정주영 회장과 부인 변중석 여사에게도 성의껏 잘하신 것 같다. 할머니는 후에 정 회장의 청운동 자택을 아침이고 낮이고 수시로 드나드는 특권을 누리셨다. 변 여사는 물론 일하는 아주머니들도 쌀집 할머니를 식구처럼 대했다.

할머니는 정주영 회장과 부인 변중석 여사에게도 성의껏 잘하신 것 같다. 할머니는 후에 정 회장의 청운동 자택을 아침이고 낮이고 수시로 드나드는 특권을 누리셨다. 변 여사는 물론 일하는 아주머니들도 쌀집 할머니를 식구처럼 대했다. 사진은 정주영과 변중석의 신혼시절. <br>
할머니는 정주영 회장과 부인 변중석 여사에게도 성의껏 잘하신 것 같다. 할머니는 후에 정 회장의 청운동 자택을 아침이고 낮이고 수시로 드나드는 특권을 누리셨다. 변 여사는 물론 일하는 아주머니들도 쌀집 할머니를 식구처럼 대했다. 사진은 정주영과 변중석의 신혼시절. 

내가 '정주영'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한국 전쟁이 끝난 뒤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할머니는 쌀집에서 일했던 일꾼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현대건설이라는 큰 회사를 차렸다거나, 무슨 큰 공사를 맡았다는 등 소소한 것까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셨다.

1958년에 준공된 제1 한강교(현 한강대교)의 입찰가격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애초 첫 낙찰회사는 단돈 1원을 입찰가격으로 써낸 흥화공작소였다. 그러나 국가에서 이를 취소하고, 재입찰한 결과 7,800만 원을 써낸 현대건설에 낙찰된 것이다. 이것이 현대건설이 전국에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였다.

다시 할머니의 옛이야기로 돌아간다. 정주영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에도 나왔던 자전거 소동이다.

"장맛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6월 하순이었어. 왕십리 큰 집에 쌀 한 가마니하고 팥 한 말을 배달할 일이 생겼어. 자전거 탈 줄 아냐고 물었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어. 탈 줄 안다고 해서 배달을 시켰지. 그런데 오전에 나간 사람이 저녁이 다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거야. 사고라도 난 게 아닌지 크게 걱정 했지."

당시 쌀집이 수도극장(후에 스카라 극장) 건너편(현 중구 인현동 1가 128)에 있었으니 왕십리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날이 어둑해져서야 진흙투성이가 되어 쌀집에 돌아온 정 회장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어떻게 된 일 이냐고 다그치니 사실은 자전거를 타 본 적이 없다는 고백이 돌아왔다. 그까짓 자전거가 별거냐고 생각했고, 못 탄다고 하고 싶지도 않았단다. 정주영 회장의 "이봐, 해봤어?"라는 도전 정신은 타고난 성품이었다.

자전거는 끌고 가면 될 줄 알았다. 비가 내려 질척거리는 길에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다가 광무대(1920년대 창극과 신파극 등을 공연하던 극장. 을지로 3가에 있었다. 1930년 화재로 사라졌으나 여전히 그 일대를 광무대 앞이라고 불렀다) 앞에서 나동그라졌다. 정주영은 진흙탕에 널브러진 자전거를 세워 쌀가마니를 다시 실었고, 그 후에도 두 차례나 더 쓰러지면서도 끝내 쌀 배달에 성공했다.

"거짓말을 한 거였어. 강원도 촌사람이 자전거를 타봤겠나. 자전거는 망가지고 배달한 쌀가마는 온통 진흙탕에 젖었겠지.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배달하고 왔으니 가상하다고 할 까. 이 젊은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날 이후 정 회장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직원에게 조르다시피 해서 매일 저녁 쌀가마니 싣고 자전거 타는 연습을 열심히 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쌀 두 가마 정도는 거뜬히 싣고 경성 장안을 누비는 자전거 선수가 됐다. 그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는 것 같았다.

세간에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아야겠다. 예전에 정주영 회장의 일생을 그린 TV 드라마가 있었다. 쌀집 주인이 술·여자와 도박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쌀집을 물려주지 않고 정 회장에게 넘겨줬다는 내용이었다. 정 회장 자서전에도 일부 이런 내용이 나온다. 아마 대필한 사람(김수현 작가)의 실수가 아닌가 싶다.

드라마에서 쌀집 주인으로 나온 남자는 나의 큰할아버지다.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제수(할머니)의 정미소 운영을 도와준 사실을 혼동한 것 아닌가 싶다.

정 회장과 동갑내기인 '주인집 아들'은 큰할아버지의 아들로 나에게는 당숙이 된다. 차소둑 할머니의 외아들인 나의 아버지는 1919년생으로 정 회장보다 네 살이나 어리다. 아버지는 당시 양정고보 학생이었고, 마라토너 손기정과 동기동창이다. (손기정은 1912년생으로 동기생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정 회장은 일이 없으면 아버지를 자전거에 태워 만리동 고개까지 등교시켜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일본 중앙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나중에 현대건설 경리 부장으로 근무하셨다.

종업원과 주인집 도련님에서 사장과 부장으로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으니 인생사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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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한일보와 합동 통신사를 거쳐 중앙일보 체육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4년 LA 올림픽, 86 서울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 베이징아시안게임, 92 바르셀로나올림픽, 96 애틀랜타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체육기자 생활을 끝낸 뒤에도 삼성 스포츠단 상무와 명지대 체육부장 등 계속 체육계에서 일했다. 고려대 체육언론인회 회장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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