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8 14:35 (월)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㉙'무정부주의자' 채플린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㉙'무정부주의자' 채플린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kpb11@hanmail.net
  • 승인 2022.11.08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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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의 '이미지'와'실체' 사이에 괴리…전쟁 중에도 호화요트 구입해 향략 즐겨
공산주의자로 인식됐지만 반(反)자본주의자일뿐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은 일천해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비인간적'이라면서도 자신의 직원을 혹사시킨 이율배반도

독일을 살린 위대한 리더. 전쟁이 끝나자 이 같은 히틀러의 '이미지'는 산산조각 난다. 전쟁광에 살인마, 미치광이라는 '실체'가 까발려진 탓이다. 채플린과 그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 역시 여기에 한 몫 했다. 그렇다면 채플린은 어떨까? 그의 '이미지'와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이미지'도 깨지고 '실체'도 까발려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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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은 히틀러를 '배우'로 봤다. 국민ㆍ국가에 대한 사랑, 카리스마 넘치는 위대한 리더십,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우상이며 신적인 존재···. 히틀러는 자신의 출중한 연기로 이 같은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채플린은 이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이미지를 깨고 그를 어릿광대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위대한 독재자>는 개봉과 동시에 대성공을 거뒀고 지금도 '위대한 영화'로 남아있다.

이제 또 다른 주인공에게 포커스를 옮겨보자. 히틀러를 '위대한 배우'로 규정한 채플린은 어땠을까? 누가 뭐래도 채플린은 '위대한 배우'다. 자타가 공인한다. 하지만 히틀러에 대한 '배우'라는 호칭과 채플린에 대한 '배우'라는 호칭은 의미가 다르다. '히틀러=배우'라 한 것은 그의 '이미지'와 '실체' 간 괴리(乖離)에 대한 것이다. 이 문법을 채플린에게도 적용시켜 보자. 채플린의 '이미지'와 '실체'는 무엇인가? 이 둘 간의 괴리는 없는 것일까?

■ 미성년자를 사랑한 '거장'

채플린의 이미지는 다 안다. 그는 영화 인생 내내 '콧수염' 달린 '꼬마 떠돌이(Little Tramp)'로서의 이미지와 함께 했다. '콧수염'은 그의 두 번째 영화 <베니스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1914)에서 첫 선을 보였고 이후 영화 <떠돌이>(1916)에서는 여기에 '떠돌이' 이미지를 덧붙였다. 그리고 19918년 <개의 생활>을 통해 '마음씨 고운 이미지'의 '꼬마 떠돌이 이미지'를 완성시켰다. 영화 속 작은 몸집은 '서민'과 '약자'의 상징이었다.

대중은 '채플린'과 '꼬마 떠돌이'를 별개로 생각하지 않았다.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였다. '꼬마 떠돌이=채플린'은 착하고 순진하고 어리숙하고 천진난만하고 순수하다, 가난하지만 사랑이 있고 미래의 희망을 갖고 산다···. 이것이 영화의 '주인공' 채플린의 이미지였다. 관객은 대부분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로써 대중은 착하고 순진한 '채플린'이었고 '꼬마 떠돌이'였으며 '그'처럼 전쟁과 대공황이 가져온 가난, 불안, 공포, 절망을 사랑과 희망으로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채플린 역시 '실체'는 '이미지'와 많이 달랐다. 하지만 대중은, 심지어 지금도, 채플린의 '실체'를 따져 묻지 않는다.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알려져 있다 해도 애써 외면하는 경향이 짙다. 대중은 채플린의 '좋은 측면'만 생각하려 한다. 왜? 대중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중은 '꼬마 떠돌=채플린'을 사랑한다. 이런 점에서 '나쁜 측면'만 생각하려는 히틀러와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채플린의 '실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미지'는 허상이요 헛것에 불과할 수 있다. '허상'과 '헛것'에 눈이 가려지면 어느 틈에 히틀러라는 '괴물'이 고개를 쳐든다. 그러니 채플린의 '이미지'도 벗겨보자. 그리고 그의 '실체'를 따져보자. 그러면 '진짜 채플린'이 우리 눈앞에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이런 취지에서 채플린의 '실체' 몇 가지를 짚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채플린의 네 부인들. 이중 세 번째 부인인 폴렛 고다드(➂)를 제외한 첫 번째 밀드레드 해리스(➀), 두 번째 리타 그레이, 네 번째 부인 우나 오닐(➃) 등은 모두 결혼 당시 미성년자들이었다.
채플린의 네 부인들. 이중 세 번째 부인인 폴렛 고다드③를 제외한 첫 번째 밀드레드 해리스①, 두 번째 리타 그레이②, 네 번째 부인 우나 오닐④등은 모두 결혼 당시 미성년자들이었다.

일단 잘 알려진 것부터 보자. 그가 성적으로 왜곡돼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나이 어린 청소년ㆍ미성년자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는 경향이 매우 짙다. 임신했다는 거짓말에 속아 결혼한 첫째 부인 해리스는 당시 열일곱이었다.

둘째 부인 그레이 역시 열다섯의 나이에 채플린의 아이를 갖고 결혼했다. 마지막 네 번째 아내 오닐도 결혼할 때 나이 열여덟이었다.

4명의 아내 중 세 명이 10대 중ㆍ후반이었던 것이다. 요즘이라면 감옥에 갔을 것이다. 참고로 <피아니스트>를 만든 거장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를 떠올려 보라.

또한 청소년기 이후, 그는 가난하지도 서민적이지도 않았다. 어릴 때는 빈곤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무대에 선 열 살 때부터 그는 연극과 영화로 성공했으며 이후 빈곤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돈에 무척이나 예민했다. 그가 미국에서 성공한 뒤 영국에 있던 형 시드니를 불렀던 편지를 보라. 온통 돈 얘기뿐이다. 그리고 그는 돈을 즐겼다. 세계가 전쟁의 고통에 신음할 때도 그는 호화 요트를 구입해 어린 여성들과 즐거운 생활을 보내고는 했다.

그가 이토록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이면에는, 물론 그 자신의 재능과 노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그가 자유롭게 돈을 벌 수 있게 해준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가 있었다. 그가 혁명 이후의 러시아에 있었다면 결코 그 같은 거부(巨富)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본주의를 부정적으로 봤다.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비인간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직원을 혹사시켰다. 극도의 이율배반(二律背反), 자기모순이었다.

하지만 그가 갖고 있던 이율배반과 자기모순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정치적 성향을 보자. 한때 그는 공산주의자로 인식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가 반(反)자본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지식은 일천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클리포드 더글러스의 '사회신용론'에 관심이 있었다지만 더글러스는 마르크스주의자나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지 않는다.

채플린의 아들 주니어
채플린의 아들 주니어

그가 갖고 있던 정치적 정체성 중 가장 명확했던 것은 그가 '무정부주의자'였다는 점이다. 이는 그 자신의 자서전이나 그에 대한 증언 곳곳에서 확인된다. 그가 심지어 국가와 정부를 혐오했다는 증언도 있다. 또한 그에게 늘 붙어 다니는 '평화주의자'나 '자유주의자'라는 꼬리표 역시 '무정부주의'와 잘 어울린다. 그에게 '집시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이 같은 그의 성향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그는 실제의 삶에서도 이 같은 무정부주의적 행태가 나왔을까? 아니다. 그에게 '반(反)정부 성향'이 있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늘 정부에 협조했다. 심지어 영화와 일상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깨면서까지 말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국을 다니며 전쟁채권을 팔았다거나 영국과 미국에서 프로파간다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이 같은 활동을 통해 그는 암묵적으로 군역 회피의 책임을 무마할 수 있었을 것이다.

종교관도 오해를 받는다. <위대한 독재자> 중 가장 유명한 장면, 즉 마지막 연설 장면에서 그는 성경을 인용한다. "당신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며 "굴종을 위해 싸우지 말라"고 외친다. 이 내용은 '누가복음 17장'에 있다는 것까지 구체적으로 밝힌다. 이 대목은 오늘날까지 그가 기독교인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유대인이라는 '설(設)'도 있지만 공감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

채플린의 아들 주니어가 1961년 출간한 채플린 관련 책
채플린의 아들 주니어가 1961년 출간한 채플린 관련 책

그는 내심 어느 신을 믿었을까? 야훼? 예수? 아니 신 그 자체의 존재는 믿었을까? 성경을 믿기는 했을까? 이를 알기는 어렵다. 이상하게도 채플린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종교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유대인이니 기독교인이니 하는 말은 모두 영화를 통한 '이미지'에서 나왔을 뿐이다. 하지만 채플린의 종교관에 대한 단서가 나온 자료가 있다. 그의 아들 채플린 주니어의 책 『내 아버지, 찰리 채플린』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아버지는 누구에게 기도를 드렸는지 모호했다. ... 내가 기억하는 한 그는 죽음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조직화된 종교를 채택할 사람이 아니었다. 교회와 회당의 건축에는 감탄했지만 의식적인 예배에는 관심이 없었다. ... '나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아버지가 여러 차례 이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또한 자신을 가리켜 '불가지론자'라고 했다. ... ''최상위 힘(Supreme Force)'이 우리 모두를 붙잡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채플린의 '실체'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더 많다. 물론 그의 '이미지'와 비교해서는 부정적이다. 그에 대한 이 '부정적 실체'는 알려진 것도 꽤 있고 파고들면 더 많은 내용이 알려질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알고도 외면하고 깊이 파헤치기도 원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짙다. 이는 대중이나 연구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매우 예외적이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우리는 '채플린=꼬마 떠돌아' 이미지를 사랑한다. 착하고 순진하고 가난하고 서민적인 그에게서 웃음과 희망을 본다. 하지만 역사는 그의 '실체' 역시 제대로 볼 것을 권한다. '꼬마 떠돌이' 이미지를 벗겨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실체'와 '이미지'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뿌연 안개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 뒤를 봐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진짜 역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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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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