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23:50 (목)
◇新남방정책과 華商역사④유통업서 두각
◇新남방정책과 華商역사④유통업서 두각
  • 홍원선 이코노텔링 대기자(중국사회과학원박사ㆍ중국민족학)
  • wsh2003@hotmail.com
  • 승인 2019.09.20 18: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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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원주민의 농산물 판매와 생활 용품 공급으로 상업유통 네트워크 형성
돈 빌려줘 벼 수확기에 돌려 받는 '고리대금업'ㆍ계 형태인 標會로 자금 융통
공개 입찰한 '징세 청부업' 에 뛰어들어 일부 화교지도자는 거부 반열에 올라

 이주 초기의 화교는 상인 계층도 있었지만 대부분 농민과 수공업자였다. 이들이 동남아로 이주한 후 주로 농장에서 농사를 짓거나 광산에서 일하고 혹은 좌판이나 행상 아니면 자신의 고향땅에서 생업으로 유지해온 각종 소규모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생활용품을 제조하며 살았다. 이른바 ‘前販後廠’( 뒤에서 만든 물건을 앞에서 판다. 즉 집안에서 제작한 각종 상품을 현장에서 판다는 의미 ) 방식의 가내공장과 가게를 겸한 상업활동을 폈다.

동남아로 이주한 화교들은 현지 장사를 해본적이 없는 원주민의 농산물의 판로를 열어주면서 자립의 터전을 닦았다. 거기서 돈이 조금 모이자 하나 둘씩  점포를 연다. 가게를 갖는 것은 성공의 표상이었다.  1900년대 초 국내에 들어온 화교 역시 끼리끼리 모여 가게를 냈다.사진=인천 차이나 타운/한국관광공사.
동남아로 이주한 화교들은 현지 장사를 해본적이 없는 원주민의 농산물의 판로를 열어주면서 자립의 터전을 닦았다. 거기서 돈이 조금 모이자 하나 둘씩 점포를 연다. 가게를 갖는 것은 성공의 표상이었다. 1900년대 초 국내에 들어온 화교 역시 끼리끼리 모여 가게를 냈다.사진=인천 차이나 타운/한국관광공사.

일부 유력 상인들은 중국과 동남아를 연결하는 무역업에 종사하기도 했으나 이는 아주 소수였다. 이처럼 중국인들의 이주 초기에는 화교자본이라 일컬을 만한 경제력 규모가 나타나지 않았다. 글자 그대로 생존을 이어가기 위한 생업차원의 경제활동이 이뤄졌을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미약한 화교들의 자본이 특유한 근면과 돈에 대한 신앙과 같은 차원의 집착, 동남아의 서구식민자와 토착민의 중간에서 중개역할을 하면서 다양한 사업 기회를 포착한다. 보잘 것 없던 자본이 점차 몸집을 키워나가면서 화교 상인의세력이 커진다. 광산이나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거나 아니면 좌판상이나 행상이거나 할 것 없이 화교들이 추구하는 가장 핵심적인 가치는 그가 가진 돈 ( 경제력 )을 키우는 것이었다. 농업노동자이거나 광산노동자이거나 아니면 행상 등 거의 모든 화교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생업은 상인이 되는 것이었다. 자신의 점포를 갖고 장사를 하는 것이 바로 성공한 화교의 표상이 됐다.

상업자본은 공업이나 농업 등 기타 산업에 비해 기동과 변신이 용이하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화교들에게는 재산의 유지와 증식, 타 부문으로의 전환에 유리하였다. 중국인들이 동남아에서 상업활동에 주력하고 이 부문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민족 간의 분업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화교들은 현지정부로부터 위임받아 세금을 대신 받아주는 '징세청부업'에 뛰어들어 거부 반열에 올랐다.
일부 화교들은 현지정부로부터 위임받아 세금을 대신 받아주는 '징세청부업'에 뛰어들어 거부 반열에 올랐다.

동남아는 전통적으로 농업국이었고 일부 도서지역은 어업이나 각종 향료작물을 재배하여 아랍이나 중국, 인도상인에게 판매하여 생업을 꾸려나간 경우도 있긴 했다. 다시 말해 동남아의 토착민은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물품을 자급자족하여 기본적으로 상업활동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화교상인이 동남아에서 새로 형성한 상업네트워크로 동남아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농산물에 대한 판로를 확보하게 되었고 거꾸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생활용품과 농자재 혹은 자금 등을 화교상인을 통해 구매하거나 대출을 받았다. 즉 자급자족 농업에서 상업형 농업으로 전환하는데 화교들이 결정적 작용을 하게 되었다. 민족간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분업관계는 화교들이 이 지역에서 빨리 뿌리내리는 데 촉매체가 됐다.

초기 동남아 화교사회는 중국 동남지역 연안의 해상무역 상인이 바다 건너 동남아와 교역활동을 시작하면서 형성되었다. 이후 이주국 항구도시에 화교상인이 거주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중국인들은 동남아 내륙으로 들어가 눌러 살기 시작했다. 심지어 벽지로까지 진출해 상업활동과 고리대금업을 동시에 벌였다.

이처럼 활동지역이 넓어지고 상품 유통망을 확보하면서 화교상인들은 이주국 전역의 상업유통망을 장악했고 중국 동남연안의 상인과 거래를 늘리면서 거대한 '유통네트워크;가 형성된다.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에서 소매상을 경영하는 화교들은 동시에 고리대금업자이기도 했다. 이들은 벼가 수확되고 다음해 다시 벼를 수확할 때까지 그와 거래하는 농가의 자금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돈을 토착농민에게 빌려준다. 빌려준 돈은 다음해 벼가 수확되면 우선적으로 현물로 상환받고, 벼 상환이 충분하지 않으면 농민들이 키우는 물소 등 가축으로 돌려 받았다. 

화교들의 유통분야 가운데 가장 보편적이고 분포지역이 넓고, 가장 많은 화교들이 종사하는 유통의 형태는 바로 소매상이었다. 원래 동남아는 자연경제 상태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서구 세력이 침투해 동남아에서 많은 공업원료를 확보해 나갔고 동시에 본국에서 생산한 공산품을 판매해야했다. 이런 매매활동 공간에 자연스럽게 화교상인들이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누구와도 갈등을 빚지 않았다. 오히려 서구세력들은 화교 상인들이 절실히 필요했다.

 토착민들은 자신의 전통산업인 농업 이외엔 관심도 지식도 없었다. 중국인 입장에서 보면 소매업은 대규모 자본도 전문적인 경영지식도 필요없고 시작도 용이했다. 뿐만 아니라 수익도 빨리 실현됐다.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생업으로선 안성마춤이었다

 또 하나 화교들이 그들의 경제력을 키워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징세청부업 ( Tax farming ) 이었다. 초기 동남아 국가에는 국가조직으로서 과세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각종 세금의 징수는 정부의 특허에 의해 민간에 맡겨졌다. 이것이 바로 징세청부업( Tax farming ) 이다. 징세청부업은 달리 보자면 국가에 의한 일종의 독점사업권이라고 볼수 있다. 동남아지역의 징세청부업자는 공개입찰방식으로 선정되었는데 주로 화교사회의 지도자들이 대거 낙찰을 받았다. 화교지도자들은 이 때  돈을 손에 쥐었다.

화교들의 자본조달을 돕는 특수한 대출방식도 존재했다. 계 성격의 표회(標會)로 일종의 대출이나 상호부조모임이다. 약 10-3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고, 각 회원은 일정금액을 내면 전체 회원이 낸 돈을 모아 정기적으로 ( 보통 1개월 ) 한 회원에게 이를 대출해준다. 대출받는 회원은 이자를 미리 떼는데 이 돈은 다른 회원들에게 배분된다. 즉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표회는 화교상인들이 사업자금을 융통하는 창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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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수 2019-10-08 12:58:06
너무 가난해서 셈이 빨라지고, 셈이 빠르니 부자가 되었고 ... 인생이란 오묘하네요, 유익한 기사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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