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0 20:53 (일)
◇新남방정책과 華商역사③生存의 '빈손 엑소더스'
◇新남방정책과 華商역사③生存의 '빈손 엑소더스'
  • 홍원선이코노텔링편집위원(중국사회과학원박사ㆍ중국민족학)
  • wshong2003@hotmail.com
  • 승인 2019.09.11 11:31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생계수단 몰락하자 '청년실업자'들 6달러 배삯도 외상으로 얻어 바다건너
태국 등서 힘겨운 이국생활 이겨내려 혈연과 지연으로 뭉친 방(幇) 만들어

 아편전쟁 이후 출현한 대량의 화교는 아편전쟁 이전의 상업(무역)을 위한 해외이주와는 그 목적이 달랐다. 이전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일종의 투자활동이었으나 아편전쟁 이후 대규모 중국인 이주자의 출현은 오로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동남아 이주를 위한 중국인의 손에는 아무 것도, 한푼의 돈도 없는 그야말로 적수공권이었다. 그들이 유일하게 가진 것은 반드시 돈을 벌어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이들이 극심한 생존난에 내몰린 건 청대의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토지와 인구의 적정비율이 무너지고 구조적인 왕조의 부패로 인한 백성들의 과중한 부담, 그리고 서구제국의 공산품 덤핑판매 등으로 동남연안의 수공업자 파산 등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아편전쟁이후 중국인들의 동남아 이주는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19세기 후반 아일랜드인들이 극심한 흉년으로 먹을것이 없자 대거 미국으로 이주한 것과 나름 비슷했다.중국인들은 바다를 건널 배삯도 없어서 외상으로 배 표를 장만했다.말레이지아,태국 등동남아에서 끼니를 걸러가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고한다.
아편전쟁이후 중국인들의 동남아 이주는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19세기 후반 아일랜드인들이 극심한 흉년으로 먹을것이 없자 대거 미국으로 이주한 것과 나름 비슷했다.중국인들은 바다를 건널 배삯도 없어서 외상으로 배 표를 장만했다.말레이지아,태국 등동남아에서 끼니를 걸러가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고한다.

아편전쟁 이전 중국인이 동남아로 가는 교통수단은 범선이었다. 해류와 바람에 의해 동남아로 가고 그곳에서 계절을 지나 계절풍이 바뀌면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는 방식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1850년대 이후 외국의 기선이 중국 연해지역을 운항하기 시작했고 1870년대부터 중국의 기선과 동남아화교가 운영하는 기선이 중국- 동남아 항로에 투입되어 동남아 이주길이 쉬워졌다고 한다. 즉 아편전쟁 이후 초기 이주자들은 여전히 범선에 몸을 싣고 비교적 가까운 태국은 20여일 정도, 먼 곳인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는 한 달을 넘는 시간을 흔들리는 범선에서 몸을 맡기고 남양으로 향했다.

아편전쟁 후 남양으로 이주하는 중국인은 우선 체력적으로 건장한 남성 청년들이대부분 이었다. 그들은 단돈 한푼도 없는 무산자였으나 무산자의식은 없었다고 많은 연구보고서가 지적하고 있다. 즉 자신의 능력과 역량으로 능히 큰 돈을 거머쥘 수 있었다고 믿고 있었고 실제 그들은 근검과 극도의 내핍으로 돈을 벌었다. 이들 청년들은 예외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 하문이나 광주 조주 등지에서 출발하는 선편의 운임이 없어 외상으로 바다를 건너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주요 목적지는 태국의 방콕이나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페낭, 말레카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 당시 바타비아 ), 필리핀의 마닐라 등지였다. 이주길이 가장 순탄했던 곳은 태국이었다. 이주자와 태국 현지에는 상호간에 혈연, 지연 등으로 얽혀있는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비교적 쉽게 현지에서 적응할 수 있었고, 불교라는 종교신앙의 공통점이 있어 두 민족사이 관계가 비교적 원활했다.

돈이 없어 외상으로 범선에 오른 이주자가 목적지에 닿으면 동남아 현지에서 이주자의 친척이나 동향인이 있을 경우에는 이들이 대신 선임을 물어주고 이주자는 이들이 주선하는 곳에서 생업에 종사하게 된다. 그러나 이주지에 사적인 네트워크가 없을 경우엔 부두에 나온 현지의 화교광산주나 농장주 혹은 상인이 대신 선임을 물어주고 이주자는 그 순간부터 자유를 상실하고 선임을 대신 물어준 사업자를 위해 2년 전후의 노동으로 선임을 갚고 난 뒤 자유를 얻고 독립하게 된다.

1871년 서양인 Huber가 기록한 내용을 보면 산두에서 태국까지 이주한 중국인이 탄 배는 범선으로 선임은 6.5달러였고, 산두에서 방콕까지는 대략 15-25일이 걸렸다고 한다. 다른 보고에 의하면 방콕까지 선임과 식비포함 15달러가 들었다는 내용도 보인다.

주로 청년 남성들이 단신으로 건너온 남양 ( 동남아 )은 낯설고 물 선 곳이었다. 이곳의 풍토와 언어, 관습, 인간관계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었고 갓 유입한 중국인으로서는 아주 가혹한 환경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적수공권이었던 이들은 새로운 환경의 동남아로 건너와서 가혹한 노동을 견뎌내는 한편 고향땅에서의 인간관계와 사회네트워크를 새롭게 구축하여 스스로의 생존능력을 강화시켜줄 울타리를 넓혀 나간다. 가장 핵심적인 사회네트워크는 바로 혈연과 지연조직이었다. 익숙하지 않고 비우호적인 환경에서 중국인 이주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의 원래 생활했던 곳, 고향에서 맺은 인연인 혈연과 지연이 거의 유일한 의지할 배경이자 울타리였다.

동남아 지역에서 화교사회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특정지역에 상당한 규모의 중국인이 모여 살아야 하고 또한 안정적인 직업 즉 농업이나 수공업 상업 등에 종사하여야 하나의 사회조직이 된다. 이들 집단이 주로 혈연이나 지연으로 뭉친 하나의 화교사회의 원형을 이루게 된다. 중국인이 모여 살면서 중국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방언을 포함한 중국어를 사용하며 전통문화와 습속을 유지하게 된다. 다음으로는 전체 이민집단이 단순히 공간적으로 모여 있다는 것을 넘어 상호간에 일정한 사회관계 달리 표현하면 다양한 사회조직을 결성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특성을 지닌 사회조직이 바로 방(幇)이다. 이런 조직을 통해 화교들은 고통스럽고 힘겨운 이국에서의 삶을 이겨나가고 결속을 다져나간다.

동남아 대표적인 화교집단은 5대방으로 볼 수 있다. 복건지역 출신으로 구성된 복건방, 광동의 동북지역의 조주이민으로 구성된 조주방, 그리고 광주 지역 일원의 광부방, 해남도 출신의 해남방 그리고 광동, 복건, 강서의 접경지역인 산악 구릉지대에 주로 거주해온 객가인들의 객가방이 그것이다. 이들 5대방이 바로 동남아의 대표적인 초기 화교사회를 형성하였다. 이들 지역에서 화교배출이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경제적인 어려움에다 상대적으로 타 지역에 비해 해외문물과 정보에 밝았고, 동남아지역과 이미 형성된 네트워크를 활용하기 쉬웠고 서구식민자들의 이들 지역에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 등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정수 2019-10-01 14:50:02
중국에 인구정책이 왜 중요한지 알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