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1 18:05 (화)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㉖'닮은 꼴 천재' 채플린과 히틀러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㉖'닮은 꼴 천재' 채플린과 히틀러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2.10.04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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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4월에 같이 태어나…불우했던 가정 환경도 비슷
대중들은 같은 '칫솔 콧수염'에 주목…둘 다 예술가 꿈꿔
채플린이 준비된 '나폴레옹 1세' 무시 '히틀러' 촬영 의아

4일 차로 태어난 동갑내기, 비정상적인 가정환경으로 불우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 그럼에도 예술가를 꿈꿨던 감성적 인물들, 각자의 활동 무대에서 영원히 기억될 수밖에 없는 천재들, 칫솔 콧수염과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카리스마로 역사에 각인된 독재자들···. 채플린은 이 '닮은 꼴 두 인물'을 한 영화에 녹여냈다. 그리고 엄청난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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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독재자>는 채플린에게 많은 고통을 줬다. 특히 촬영 전부터 쏟아진 '프로파간다'라는 말이 그를 괴롭혔다. 1936년 작 <모던 타임스> 때도 그랬다. 당시 언론은 이 영화에 대해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라 비난하지 않았던가. 아닌 게 아니라 그래 보였다. 기계화ㆍ자동화ㆍ대량생산 등 자본주의 체계의 특성을 시종일관 비판하고 있었다. 특히 주인공 '떠돌이'가 빨간 깃발을 힘차게 흔드는 장면은 '공산주의 선전물'이라는 얘기를 들을 만 했다.

그런데 4년 뒤 내놓은 영화 <위대한 독재자>에도 이 같은 '프로파간다'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당연한 얘기였지만,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라는 <모던 타임스>에 대한 평가는 주로 우파 쪽에서 나왔다. 이번에도 그랬다. 우파, 특히 극우파에서 비판이 터져 나왔다. '협박'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파시즘은 공산주의와 대치하고 있었다. 극우 파시즘의 상징인 히틀러에 대한 '조롱'이 담긴 영화를 가만 둘리 없었다.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위대한 독재자>를 제작하면서 내 앞으로 요상한 편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 그중에는 영화를 개봉하면 영화관에 최루탄을 던지고 스크린을 벌집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협박 편지도 있었고 폭동을 일으키겠다는 편지도 있었다."

우리는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마지막 궁금증을 갖게 된다. 채플린은 왜 그리고 어떻게 히틀러에 대한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왜 고생을 사서 했던 것일까? 당시 상황을 보면 히틀러는 세계의 '요주의' 인물이 틀림없었다. 그로 인해 유럽은 언제든 전화(戰火)를 겪을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당시 파시즘과 공산주의 간 진영 대결이 치열했다. 파시즘의 '보스' 격인 히틀러를 풍자하는 데에는 당연히 위험이 따랐다.

■ 나폴레옹 대신 히틀러?

게다가 그는 준비된 다른 작품이 있었다. <나폴레옹 1세>였다. 영화는 그의 오랜 꿈이었다. <모던 타임스> 개봉 전 이미 촬영이 준비돼 있었다. 1936년 1월 스크립터를 마무리 짓고 판권 등록까지 마쳤다. 하지만 그는 '나폴레옹'을 포기했다. 그리고 '히틀러'를 선택했다. 무엇보다 나폴레옹을 코미디로 표현하는 데 한계를 느꼈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왜 그 대안이 히틀러였을까? 이에 대한 채플린의 구체적인 해명은 없다.

나폴레옹으로 분장한 채플린. 나폴레옹에 대한 영화는 채플린의 ‘꿈’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폴레옹으로 분장한 채플린. 나폴레옹에 대한 영화는 채플린의 '꿈'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의문이 든다. 채플린이 느꼈던 히틀러의 매력 포인트는 무엇이었을까? 나폴레옹과는 달리 희화화가 가능했다는 이유 하나일까? 이제 마지막으로 그 의문을 풀어 보자. 시작은 1939년에 게재된 한 기사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 같다.

"50년 전 이 무렵 신의 섭리는 아무래도 빈정거리는 쪽이었던 모양이다. 바로 이 주에 찰리 채플린과 아돌프 히틀러가 4일 간격으로 세상에 태어났던 것이다. ···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대로, 사회라는 맷돌에 갈려 신음하는 수백만 인에 대한 사상과 감정과 염원을 표현해 왔다. 그들이 태어난 시기처럼 비슷한 작은 코밑수염으로 볼 때 두 사람은 나면서부터 자신들의 천재를 공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1939년 4월 21일 영국의 보수잡지 『스펙테이터(The Spectator)』에 실린 기사 한 구절이다. 4월 21일이면 채플린과 히틀러 모두의 생일 근처다. 채플린은 1889년 4월 16일, 히틀러는 같은 해 4월 20일 태어났다. 채플린이 4일 먼저 태어난 '형(兄)'이다. 마침 기사가 나온 해는 둘 모두 태어난 지 50년이 된 해였다. 며칠 전 채플린과 히틀러 모두는 50회라는, 뜻깊은 생일상(床)을 받았을 것이다.

그랬다. 채플린과 히틀러는 닮았다. 기가 막힐 정도였다. '신의 섭리'를 넘어 '신의 장난'이란 말까지 나올 만했다. 뭔가 서로를 상기시키는 공통점이 많았는데, 어떤 것은 완전히 반대인 상징을 갖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채플린도 히틀러도 그 같은 공통점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히틀러는 이에 대해 무척이나 신경을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뭐가 공통점인지, 또 어떤 공통점들이 완전히 상반된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 하나하나 따져보자.

① 탄생. 앞서 말했듯, 둘 모두 1889년 4월 생. 채플린이 4일 먼저 태어난 '형(兄)'이다.

② 유년기. 둘 모두 정상적이지 않았다. 잘 알려져 있듯 채플린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로 가정을 돌보지 않았고 어머니는 정신질환자였다. 히틀러는, 비록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지만,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와 심한 갈등을 겪었다.

➂ 둘은 모두 예술가를 꿈꿨다. 채플린은 이미 다섯 살 때 어머니를 대신해 무대에 섰고 여덟 살 때는 정식 배우의 길을 걸었다. 화가를 꿈꿨던 히틀러는, 비록 낙방하기는 했지만, 빈에 있는 '국립미술아카데미'에 입학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➃ 그러나 대중이 둘의 공통된 특징으로 가장 잘 파악했던 것은 콧수염이었다. 둘 모두 칫솔 콧수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격은 매우 상반됐다. 채플린의 콧수염이 친근하고 코믹했던 반면 히틀러의 콧수염은 권위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⑤ 둘의 복장 또한 비교대상이었다. 채플린의 구겨진 중산모, 삐뚤빼뚤한 지팡이, 자루처럼 헐렁하고 큰 바지, 벽에 부딪힌 이마처럼 앞이 튀어나오고 주워 신은 듯 큰 구두는 히틀러의 군용 바이저캡(visor cap), 말채찍, 승마바지, 길고 매끈한 군화 등과 비교됐다. 완전한 우연이었지만 채플린의 용모는 그 자체로 히틀러의 풍자처럼 여겨졌다.

채플린과 히틀러를 비교한 한 언론의 정치 만평.
채플린과 히틀러를 비교한 한 언론의 정치 만평.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희극배우 채플린,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미움 받는 독재자 히틀러. 평가와 정체성이 상극(相剋)인 이 둘의 외모가 그토록 닮았다는 사실은, 대중은 물론 언론, 정치인 등 많은 이에게 히틀러에 대한 풍자의 도구가 됐다. 세계 많은 언론이 히틀러를 묘사할 때 채플린을 등장시키며 그의 권위와 체통, 격(格)을 깎아 내렸다. 서구 언론은 "아무리 날뛰어도 히틀러는 어릿광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다. 둘의 '닮은 꼴'은 단지 '외관(外觀)'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둘은 더 중요한 측면에서 '닮은 꼴'이다. 성격과 스타일,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 방식이다.

무엇보다 둘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독재자'였다. 채플린은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아니었느냐고? '천만해'다. 채플린은 모든 자기 마음대로 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고 심하면 바로 해고했다. 이유도 모른 채 해고당한 근로자도 있었을 정도. 완벽주의자였던 그의 성격 탓에 상처를 입은 근로자는 셀 수 없이 많았을 것이다. 1주일 만에 해고된 한 근로자는 그를 가리켜 "독재자"라며 "그는 직원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했다"고 썼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게 있다. 둘은 모두 영화를 좋아하고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마자 했던 일이 바로 선전영화 제작이었다. 여감독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을 시켜 만들게 한 <의지의 승리>나 <민족의 제전> 등을 떠올려 보라. 히틀러의 충직한 부하로, 선전장관을 지낸 파울 괴벨스(Paul J. Goebbels)가 그의 수족 노릇을 했다는 사실도 이미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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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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