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21:35 (금)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㉑천수 누린 샤흐트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㉑천수 누린 샤흐트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2.08.19 1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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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음 엄청나게 발행해 아우토반 등 SOC 구축 … 실업자 줄고 '강력한 군대' 탄생
경제 재건이 '강한 독일'서 '침략국 독일'로 변질 … 화폐발행 늘어 인플레 먹구름
전쟁반대했다가 수용소행…' 반평화 범죄 '로 전범 재판 받았지만 무죄로 풀려나

요한 구스타프 카이텔 독일 총 사령관, 헤르만 빌헬름 괴링 국가 원수,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독일 친위대 돌격대장···.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거행된 군사재판에 이름을 올린 전범들이다. 이 재판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독일 전범들을 처벌하기 위해 열렸다. 그리고 얄마르 샤흐트. 그의 이름도 이들과 함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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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마르 샤흐트(Hjalmar Schacht). 결과적으로 그는 두 번의 '샤흐트 매직'을 보여줬다. 1923년 '땅본위제 화폐 렌텐마르크'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진압한 '화폐 매직'과 11년이 지난 1934년 '환어음인 메포어음'을 통한 '어음 매직'이 그것이었다. 메포어음은 대공황의 극복은 물론 '재무장'이라는 히틀러의 '꿈'을 이뤄줬다. 게다가 어음은 정부의 재정이나 국채장부에 기재되지 않았다. 독일의 재무장을 우려한 승전국들의 눈을 속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땅본위제'라는 얼토당토않은 화폐, 유령회사를 앞세운 환어음의 발행과 이자지급. 당시에도 훗날에도 평가는 부정적이다. '사기'나 '기만'이라는 단어가 따라다닌다. 하지만 어쩌랴. 그 '실효(實效)'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땅본위제 화폐'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유령회사가 최종 지급자인 환어음'은 대공황을 이겨냈다. 물론 "일시적인 효과였을 뿐"이라는 평가까지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근거가 미흡하다는 주장 역시 틀리지 않다.

■ 메포어음, 또 다시 인플레의 늪으로

메포어음의 발행량은 엄청났다. 1934년 가장 먼저 발행됐던 어음 액수는 21억4000만 라이히스마르크. 1923년 화폐개혁 때 발행했던 '땅본위제 화폐'가 약 6억 달러에 해당되는 24억 렌텐마르크였고 1924년에는 이를 금본위 화폐인 라이히스마르크와 1:1 비율로 교환해 줬다. 첫 회 메포어음 발행액과 비슷한 수치였다. 이를 근거로 메포어음의 첫 회 발행액이 얼마나 컸던 것인지를 어림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어음 발행은 계속됐다. 1935년에는 첫 해보다 많은 27억2000만, 1936년에는 그 2배에 이르는 44억5000만, 1937년(1938년 3월 31일까지)에는 또 다시 26억9000만 라이히스마르크 규모의 어음을 발행했다. 히틀러는 이 돈을 그야말로 요긴하게 썼다. 아우토반 건설 등 사회 인프라 구축에 돈을 써 일자리를 창출했고 탱크와 기관총을 만들고 군인들 밥 먹이는 데 썼다. 그 결과 실업이 줄고 강력한 군대가 창출됐다.

하지만 경제에도 빛과 어둠이 있게 마련이다. 메포어음의 과다한 발행은 이 어음의 최종 지급자인 중앙은행 라이히스방크의 화폐 발행으로 이어졌고 그러자 물가가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샤흐트는 이미 인플레이션의 극심한 폐해를 겪었던 인물이다. '땅본위제 화폐'를 발행한 뒤 어떻게 해서든 과도한 화폐발행을 막으려 했던 그다. 그런데 메포어음을 너무 많이 찍었던 것이다. 물론 그 귀에는 히틀러가 있었다.

샤흐트 마련해준 전비로 군대를 키운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사진은 폴란드 점령 후 바르샤바 거리를 행진하는 독일군.
샤흐트 마련해준 전비로 군대를 키운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사진은 폴란드 점령 후 바르샤바 거리를 행진하는 독일군.

샤흐트는 고민했다. 인플레이션도 그렇지만 군비확충은 더 큰 문제로 여겨졌다. 히틀러의 군대는 점점 더 크고 강해졌고 이제 방위가 아닌 침략의 도구로 성장했다. 샤흐트의 목적은 '강한 독일'이었지 '침략국 독일'이 아니었다. 그는 결국 반발했다. 1938년 채권발행을 중단했고 1939년 1월에는 대놓고 전쟁을 반대, 히틀러와 정면충돌했다. 당연히 샤흐트가 졌다. 며칠 뒤 샤흐트는 중앙은행 총재를 그만뒀고 경제장관직도 이름만 유지될 수 있었다.

이제 샤흐트는 히틀러에게 '미운털'이 박혔다. 그토록 바라던 '제국의 꿈'을 부정하는 인물이 아닌가. 그를 내쫓은 히틀러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아예 중앙은행을 국유화시켰다. 이제 히틀러의 말 한 마디면 돈을 마음껏 찍어낼 수 있었다. 전쟁에 대한 광기가 정점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1939년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 마침내 세계가 그토록 우려하던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을 올렸다. 샤흐트를 중앙은행에서 내쫓은 지 8개월 뒤였다.

■ 히틀러 vs. 샤흐트, '동지'에서 '적'으로

전쟁이 나자 샤흐트는 더욱 히틀러에 반발했다. 전쟁이 난 뒤에도 샤흐트는, 이름뿐이기는 했지만, 경제장관직은 유지하고 있었다. 장관으로서 그는 지속적으로 "전쟁은 나라를 망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창 전쟁이 진행 중인데도 그는 그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그를 히틀러가 그냥 둘리 없었다. 1943년 1월, 히틀러는 그를 장관직에서도 해임했다. 중앙은행 총재에 이어 히틀러는 자신이 샤흐트에게 준 모든 관직을 벗겨버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히틀러의 노여움은 가라앉지 않았다. 마침 그럴듯한 핑계가 생겼다. 1944년 일명 '발키리작전'이라 불리는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이 터지자 히틀러는 그 배경에 샤흐트가 있다며 그를 강제수용소로 보내버린다. 이렇게 히틀러와 샤흐트의 관계는 종료된다. 정치적 동료로 출발해 독일재건을 위한 동반자로 활동하던 그 둘은 결국 철천지원수로 끝을 내고 만 것이다. 히틀러의 성공가도에 레드카펫을 깔아줬던 샤흐트였지만 끝은 비참했다.

뉘른베르크 군사재판.
뉘른베르크 군사재판.

그러나 '인생사새옹지마(人生事塞翁之馬)'라 했다. 샤흐트의 강제수용소행은 결과적으로 그를 도왔다. 전후 전범 처리 과정에서 그에게 면죄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상 그의 수용소 생활은 얼마 가지 않았다. 독일의 패배, 히틀러의 자살을 거쳐 미국의 독일 진주가 이뤄지면서 그는 수용소에서 풀려났던 것이다. 수용소에 들어간 게 1944년 7월, 풀려난 게 1945년 4월이었으니 그의 수용소 생활은 채 10개월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는 않았다. 샤흐트는, 비록 말년에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기는 했지만, 히틀러의 전쟁에 기여했다. 지금도, 그가 없었다면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을 정도다. 그는 수용소 출소 후 다시 연행돼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됐다. 죄명은 '반평화적 범죄를 위한 공모죄' 및 '침략전쟁을 계획하고 실행한 죄'였다. 그러나 결론은 무죄. 그는 "전쟁을 반대했다"며 '무죄'를 주장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샤흐트는 풀려났다. 하지만 남은 게 또 있었다. 서독이 주관하는 국내 전범 재판이었다. 이 재판에서는, 그는, 유죄를 선고받았다. 5년형. 그러나 1년 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이후 그는 잘 먹고 잘 살았다. '돈'과 관련된 그의 재능을 탐냈던 이가 많았다. 뒤셀도르프은행에 들어간 그는 브라질, 이란, 이집트, 시리아 등 많은 나라의 경제자문을 역임했다. 그의 사망연도는 1970년. 93세였으니 천수를 누렸다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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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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