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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⑫ 1923년 獨화폐개혁의 기적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⑫ 1923년 獨화폐개혁의 기적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2.04.24 15: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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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중앙은행 '라이히스방크'가 새 돈 렌텐마르크 내놔
1조 마르크 대 1 마르크 교환이라는 리디노미네이션 단행
금과 은이 아닌 땅본위의 화폐임에도 ' 살인적 물가 ' 잡아

땅을 담보로 발행한 화폐 렌텐마르크. '금본위제'의 '금'을 '땅'으로 대체했으니 '땅본위제'로 부를 만하다. 하지만 이 같은 '땅본위제 화폐'는 렌텐마르크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 전에도 있었다. 프랑스혁명 때였다. 당시 혁명을 주도했던 의회는 혁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땅을 담보로 한 화폐를 만들기로 했다. 바로 '아시냐'였다.

1923년 11월 15일. 기억할 만한 날이다. 이날 독일 중앙은행인 라이히스방크(Reichsbank)는 새 돈 렌텐마르크(Rentenmark)를 발행한다.

그리고 5일 뒤인 20일, 1조 마르크 대 1 마르크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비율의 화폐개혁, 즉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을 단행한다.

렌텐마르크가 발행되자 순식간에 인플레이션이 진정됐다.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경제의 목을 조이던 하이퍼인플레이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가리켜 '렌텐마르크의 기적(奇跡)'이라 부른다.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다. 한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목표 아래 새 화폐를 내며 대대적인 규모의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한다. 이거, 당연한 거 아닌가? 특정 정책이 정책 실시 뒤 그 목표를 달성한다.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다니. 뭔가 다른 사연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5달러 지폐 뒷면. “금으로 바꿔준다”는 글귀가 있다.
5달러 지폐 뒷면. "금으로 바꿔준다"는 글귀가 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인플레이션의 수준 문제다. 몇 년 사이 물가가 1조배가 뛰었다. 이 세상 일 같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새 돈을 낸다고 과연 잡힐까? 이런 의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됐다. 그것도 어느 한 순간에. '기적'처럼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는 '새 돈'의 성격이다. 만일 새 돈이 '금'을 기초로 했다면, 즉 금본위제에 의해 작동됐다면 얘기가 달랐을 것이다. 그런 통화라면 인플레이션을 잡는 게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화폐 뒤에 '금'이라는 믿을만한 후원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돈은 '금'이 아닌 '땅'에 연동돼 있었다. '비상식적'이었다. 이 화폐가 상상을 뛰어 넘는 거대 인플레이션을 잡는다? 그에 대한 의구심은 당연했다. 그런데 성공했다. 비상식적인 통화가 비상식적인 인플레이션을 이겼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진짜 '기적'이란 말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 렌텐마르크, 화폐에 대한 상식을 뒤집다

렌텐마르크는 당시 세상이 갖고 있던 '돈'에 대한 상식을 뒤집었다. '돈의 역사'와 관련해서는 그야말로 한 획을 그은 일대 사건이었다. '돈'은 '가치'를 갖는다. 금화나 은화는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종이돈'은 아니다.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다. 일정 금액이면 금이나 은으로 바꿔줘야 한다. 순금이나 순은이면 더욱 좋다. 그래야 가치가 생긴다. 실제로 옛날 돈에는 뒷면에 "금으로 바꿔준다"는 글귀가 있다. 결국 '종이돈'이란 은행으로부터 금과 은을 찾을 수 있는 일종의 '권리증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땅'은 그렇지 않다. 일정액의 돈을 가져가면 땅을 준다? 땅값은 다 제각각인데. 게다가 상대적이다. 내가 생각하는 땅값, 정부가 생각하는 땅값은 다 다르다. 게다가 주면 뭐 하나. 주머니에 넣을 수도, 집에 가져갈 수도 없는데. 그래서 '땅'을 담보로 발행된 종이돈은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공했다. 모두가 종이쪼가리가 된 파피어마르크를 들고 와 땅과 연계된 이 렌텐마르크로 바꿔갔던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기적'이라 부를 만 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돈'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하게 된다. '금'과 '땅'은, 물론 둘 모두 가치를 갖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금은 일정 순도를 유지할 수 있다. 또 옮길 수도 있고 들고 다닐 수도 있다. 금을 토대로 한 '종이돈'은 일정한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땅은 그렇지 않다. 땅마다, 또 시기마다, 또 생각마다 가치가 다르다. 땅을 토대로 한 '종이돈'의 가치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다. '돈'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얘기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웠던 이 '종이돈' 렌텐마르크를 선호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종이 값도 못하는 종이돈 파피어마르크를 들고 와 이 렌텐마르크로 교환해 갔다. 아무튼 종이 값도 안 되는 파피어마르크보다는 그 가치를 더 인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생각이 어쨌든 결과는 같았다. 이로써 도무지 통제가 될 것으로 보이지 않던 인플레이션도 잡을 수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돈에 대해, 아니 돈이 갖는 '가치'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즉, '종이돈'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무엇인가와 연계만 되면 된다는 것이었다. '금'이든 '은'이든 심지어 '땅'이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의 기원은 오래됐다. 렌텐마르크가 발행되기 134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직후였다. 혁명정부는 돈이 없었고 금도 없었다. 그러자 '꿩 대신 닭'을 썼다. 금 대신 땅을 담보로 통화를 찍어냈던 것이다. '아시냐(Assignat)'라는 이름의 지폐가 바로 그것이었다.

■ 최초의 '땅본위 화폐' 아시냐는 실패

프랑스 역사학자 피에르 빌라르는 아시냐가 "화폐체제를 뿌리 채 흔들어 놓았다"고 평가했다. 아시냐는 전적으로 프랑스혁명의 결과였다. 혁명은 1789년 7월 14일 성난 민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시작됐다. 이 폭동으로 설립된 국민의회는 이후 혁명을 이끌어 나갔다. 기득권층의 각종 기득권을 철폐하며 '인권선언'을 발표한 것도 모두 국민의회 주도였다. 아시냐 발행도 마찬가지. 아시냐는, 의회의 결정에 따라, 1789년 12월 혁명 과정에서 부족한 재정 충당을 목적으로 발행된다.

프랑스혁명 직후인 1792년 발행된 ‘땅본위 화폐’ 아시냐
프랑스혁명 직후인 1792년 발행된 '땅본위 화폐' 아시냐

아시냐가 처음부터 지폐로 계획됐던 것은 아니다. 시작은 공채였다. 교회와 귀족으로부터 몰수한 땅을 담보로 이자율 5%의 채권을 발행했던 것이다. 문제는 발행량이었다. 첫 회 발행액은 4억 리브르였으나 이후 지속적으로 채권을 발행, 발행 첫 해만 70억 리브르에 달했다. 의회는 문제를 채권 보유자에게 떠넘겼다. 다음해인 1790년 이자율을 0%로 낮추고 소액권을 내놔 화폐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정책을 바꿨던 것이다. 발행량은 이후에도 계속 증가해 1791년부터 가치 폭락이 시작했다.

아시냐는 확실히 혼란기의 산물이었다. 화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정치인이 당장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금 대신 토지를 담보로, 처음에는 공채로 발행했던 것을 나중에는 화폐로 전환시켰다. 게다가 무한정 찍어냈으니 화폐 가치의 폭락과 물가 상승은 불을 보듯 뻔했다. 발행 2~3년 사이 화폐 가치는 10분의 1 수준으로, 물가는 10배 이상 폭등했다. '땅을 담보로 한 화폐의 발행'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130년이 지난 1924년 옆 나라 독일이 똑같은 일을 한다니 전문가들이 의구심을 보내는 것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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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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