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루의 집을 중정이 뒤졌다는 소문이 돌자 정부 내 반(反)쓰루 세력들 결집해

각료 해임 해프닝 한 달 뒤 1971년 11월 어느 날, 쓰루의 혜화동 집 2층의 서재에 도둑이 들었다. 부총리 사저는 통행금지 시간에도 동네 파출소에서 경계근무를 하는 곳인지라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통행금지 시간에 시내를 오갈 수 있는 집단은 중앙정보부뿐이었다.
그의 뇌리를 스쳐 간 것은 수년 전 왕초의 집무실이 털린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왕초의 비리를 캐내어 그를 자기들 손아귀에 넣기 위해 벌인 것으로 세상은 알고 있었다. 쓰루는 즉시 서재 벽에 '당신들이 찾는 것은 여기에 없다'라는 쪽지를 써 붙였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그가 관여했던 정치자금의 장부였다고 그는 짐작하고 있었다. 거기서 행여나 있을지 모르는 '정치자금 배달 사고'의 꼬투리를 잡겠다는 얘기였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 부장은 소위 '정치자금 4인방'의 한명으로서 정치자금 모금에 한 역할을 해냈다. 집권 세력 내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이 부장이 1969년 10월 주일 대사로 나가 있는 사이에, 쓰루가 외자 도입 절차를 투명화하여 정치자금 4인방 체제가 무너져버렸다. 1971년 선거를 위해 중앙정보부장으로 컴백한 이 부장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권력 구조의 변화였다. 그래서 쓰루를 손아귀에 넣기 위해 절도 사건을 벌였다는 게 쓰루와 그 주변 사람들의 분석이었다.
물론 그날 절도 시도는 헛수고였다. 아니, 그 일을 벌인 측 또한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랬는지 모른다. 그게 쓰루 측근들이 짐작하는 바였다. 누가 그런 일을 벌였을지 권력 주변 누구나 알 수 있게 절도 사건을 벌인 것 자체가, 자기네들한테 '평소에 최소한의 존경심을 표하라' 또는 '모든 걸 우리를 통하지 않고 박통과 직거래할 생각하지 마라'는 일종의 겁박(?)이었다는 얘기였다.
어쨌든 그 사건으로 박통의 또 다른 권력 수단인 정보 권력과 해소할 수 없는 간극이 벌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사건은 각료 해임 사건에 이어 부총리로서 쓰루의 권위에 상당한손상을 입힌 두 번째 사건이었다. 쓰루 몰락의 신호탄이 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쓰루의 집을 중정이 뒤졌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정부 내 반(反)쓰루 세력으로 하여금 그에게 직접 칼을 겨누는 일을 벌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