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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⑧ 케인스와 히틀러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⑧ 케인스와 히틀러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2.03.28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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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에 '공개서한'까지 쓰고 미국도 찾았던 케인스
자급자족 경제에 공감했던 히틀러에 영향 준 흔적은 없어
케인스 전기속엔 "독일, 제어 되지 않는 사람의 손아귀에"

루즈벨트와 뉴딜의 뒤에는 막강 파워를 자랑하는 경제학자가 있었다. 누군지 다들 아실 거라 믿는다. 케인스였다. 누가 뭐래도 그는 '당대 최고'였다. 그의 조언은, 뉴딜의 큰 그림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해도, 개별정책에 대한 영향력은 적지 않았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히틀러의 뒤에는 누가 있었을까? 거기에도 케인스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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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는 머리만 좋은 게 아니었다. 기민한데다 강력한 추진력까지 있었다. 이슈가 생기면 재빨리, 그리고 앞뒤 안 가리고 밀어붙였다. 유력한 지인을 설득하는 것은 물론 언론, 강연, 연설 등을 통해 자기주장을 퍼뜨린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총 정리한 저서를 발간하며 막을 내린다. 말발이나 논리, 어법 등이 세상의 주목을 끌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1919년 1월 시작된 파리강화회의를 전후한 시점에서 1920년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 나올 때까지의 과정을 보라.

케인스가 루즈벨트에게 쓴 ‘공개서한’
케인스가 루즈벨트에게 쓴 '공개서한'

대공황기에도 그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루즈벨트가 취임했던 1933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뉴욕타임스』에는 그가 쓴 '공개서한'이 실렸다. 한 면을 꽉 채운 장문의 편지였다. 발신인은 케인스, 수신인은 루즈벨트였다. 이때에도 당대 최고의 언론인으로 평가받던 지인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즈벨트의 경제정책 뉴딜에 대한 평가와 조언이 가득 담긴 이 긴 '공개서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었다.

"지금 영국에 있는 각하의 동조자들은 때로는 긴장하고 때로는 낙담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긴급 사안과 관련해 그 우선순위가 올바르게 이해되고 있는지, 목표에 대한 혼란은 없는지, 또 각하께서 듣는 조언 중 어리석거나 괴이한(crack-brained or queer) 것은 없는지 걱정입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불쾌한 내용일 수 있었다. '어리석거나 괴이한 조언'이라니. 루즈벨트 주변의 정책 조언자였다면 더욱 불쾌감을 느꼈을 수 있다. 하지만 케인스의 지적과 비판에는 일리가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뉴딜정책은 크게 세 부문으로 구성된다. ➀사회개혁(Reform) ➁경기회복(Recovery), 그리고 ➂빈민구제(Relief)였다. 개별 정책으로 들어가면 수 십 가지가 된다. 이 정도면 정책 혼선이나 충돌은 오히려 당연한 것 아닐까? 케인스는 바로 그것을 지적했던 것이다.

■ 케인스 "독일은 제어되지 않는 사람들이 장악"

그가 특히 중시했던 정책이 있었다. 사회개혁 부문 정책 중 하나인 전국산업부흥법(NIRA, 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였다. 이 법은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으로 임금을 증대시키는 한편 경쟁제한과 가격협정으로 과잉생산을 억제하고 물가의 하락을 방지해서 구매력을 증진"시키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케인스는 과연 이 법이 산업을 부흥시킬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했다. 기업의 경영 의지를 훼손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나아가 그는 이 법으로 인해 향후 연방정부가 큰 압력에 시달릴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뉴딜에 대한 케인스의 간여 시도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다음해인 1934년 5월에는 직접 미국을 찾았다. 현지 기업인과 금융인을 만나 뉴딜에 대한 의견을 들었으며 루즈벨트 정책팀과도 장시간 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5월 28일 케인스는 루즈벨트를 직접 만난다. 대공황과 뉴딜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을 것은 불문가지다. 케인스와 뉴딜의 관계에 대해 훗날 역사가들은 이런 평가를 나놓았다. 비록 뉴딜 전체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으나 몇몇 개별정책에는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케인스와 히틀러의 관계는 어땠을까? 히틀러도 루즈벨트와 유사한 '국가주도' 및 '일자리' 정책을 펼쳤다. 그도 케인스의 조언을 받았던 것일까? 아니면, 루즈벨트 사례처럼, 정책 전개 과정에서 케인스의 공개서한이라도 받았던 것일까? 아니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케인스는 히틀러의 경제정책에 대해 어떤 얘기도 하지 않았다.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는 정설이다. 케인스의 전기를 쓴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의 말을 들어 보자.

"히틀러의 복구 프로그램은 제국주의적 목적 및 테러리스트적인 방법과 너무 얽혀 있어서 도저히 케인스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케인스는 자유사회를 구원하려 했던 것이지 파괴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 그는 '독일은 제어되지 않는 무책임한 사람들의 손아귀에 있다'고 썼다. 또 '그들은 신체와 영혼이 모두 피폐해져 있다'고도 썼다."

히틀러와 케인스의 공통점은 또 있다. 모두 자급자족 경제를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관련성을 찾기 어렵다. 시점만 보면 모호한 구석이 있다. 케인스는 1933년 4월 강연에서 이미 '국민적 자급자족(National Self-sufficiency)'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또 두 달 뒤에는 같은 제목으로 논문까지 썼다. 그리고 또 두 달 뒤인 1933년 8월에는 이 논문이 독일에서 출판되기도 했다. 독일에서도 그만큼 관심을 끌었다는 얘기다.

히틀러가 1920년대 초ㆍ중반 쓰고 출간한 『나의 투쟁』 원본. 히틀러의 ‘자급자족 경제’에 대한 발상은 이미 이 책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히틀러가 1920년대 초ㆍ중반 쓰고 출간한 『나의 투쟁』 원본. 히틀러의 '자급자족 경제'에 대한 발상은 이미 이 책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히틀러가 집권 후 공식적, 그리고 구체적으로 자급자족 경제를 제시한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인 1934년 9월의 일이었다. 이때 히틀러 정부는 이른바 '신계획'을 제시하며 '자급자족(Autarky)'을 주요 의제로 올려놓았다. 각종 원자재와 식량의 수입을 제한하고 수입선도 독일의 주요 수출국으로 한정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남동부 유럽에서의 수입은 늘고 서유럽으로부터의 수입은 줄어들었다.

히틀러가 자급자족 정책을 궁극적인 경제목표로 설정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로써 히틀러와 케인스가 엮일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될 수 있다. 시차로 보면 히틀러가 케인스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해석은 잘못일 가능성이 높다. 케인스와 히틀러가 말하는 자급자족의 개념과 배경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게다가 주창 시기도 히틀러가 훨씬 앞설 수 있다.

사실 케인스는 자유무역 옹호론자였다. 그러다 입장을 바꿔 반대론자가 됐다. 대공황을 겪으며 자유무역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이다. 자유무역의 근간이 되는 분업의 강점은 그다지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으며,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결합은 자칫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생각이 그를 자유무역보다는 보호무역의 성격이 강한 자급자족 경제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반면 히틀러의 자급자족은 케인스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애초부터 유럽과 세계제국을 꿈꾼 히틀러였다. 독일은 재무장해야 했고 또 이를 위해 물자가 필요했다. 주변국들이 이를 순순히 내줄 리 없었다. 그러니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이것이 히틀러가 말한 자급자족경제의 배경이다. 밖에서 필요한 것은 약탈 대상이었다. '유럽의 빵공장' 우크라이나, 원유 산지 루마니아 등이 그 1순위였다. 이 같은 생각은 이미 1925년 발간된 그의 책 『나의 투쟁』에 담겨 있다. 히틀러의 자급자족 계획은 이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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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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