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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⑦ 美獨지도자의 묘한 인연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⑦ 美獨지도자의 묘한 인연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2.03.2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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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1월 히틀러의 총선 승리 이틀 후 루즈벨트는 대통령 당선
대공황 와중 동시에 집권 … 20 ~ 35%에 이른 실업률 타개가 시급
시장 못 믿어 국가의 역할 강조…1945년 4월 18일 차이 순차 사망

루즈벨트와 히틀러의 인연은 묘하다. 시작부터가 그렇다. 이틀 차이로 권좌에 오른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처한 상황도 비슷했다. 대공황의 와중이었다. 경제위기를 겪고 있었고 그 위기를 이겨내야 했다. 열심히 일했다는 점도 공통점일 것이다. 거기에 사망일도 비슷했다. 루즈벨트는 1945년 4월 12일, 히틀러는 4월 30일 죽었다. 시차가 20일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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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즈벨트와 히틀러.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둘이 권좌에 오른 것이 고작 이틀 상관이었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은 1932년 11월 6일 총선에서 승리했고 이틀 뒤인 8일에는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두 수반(首班)이 맞닥뜨린 상황도 거의 같았다. 미국 뉴욕 증시에서 터진 경제핵폭탄의 여세가 계속되고 있었다. 나라경제가 안 돌아갔고 실업이 만연했다. 당연히 국민의 삶도 처참했다.

그러니 둘에게 주어진 미션도 동일했다. 경기를 살려야 했고 무엇보다 실업을 타파해야 했다. 두 나라 실업률이 20~35%에 이르렀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따라서 국민은 두 리더에게 힘을 실어줬다. 미국 국민은 루즈벨트에게 60% 가까운 지지율로 압승을 선사했다. 히틀러는 1년 뒤 국회를 겁박하며 아예 국회 동의 없이 법을 제정할 수 있는 장치까지 마련했다. 상식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특권이었지만 국민은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1918년 11월 발발한 독일혁명. 러시아혁명에 뒤이은 것으로 노동자혁명에 대한 독일 대기업의 두려움이 폭증하는 계기가 됐다.
1918년 11월 발발한 독일혁명. 러시아혁명에 뒤이은 것으로 노동자혁명에 대한 독일 대기업의 두려움이 폭증하는 계기가 됐다.

정책이 파격적이었다는 점도 같았다. 둘 모두 시장을 불신했다. 경제를 살리려면 국가가 직접 나서야 한다고 믿었다. 루즈벨트가 취임 후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은행휴일' 명령이었다. 취임 첫날인 1933년 3월 4일 전국 은행의 영업을 중단시켰던 것이다. 금의 유출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여기에 개인이 금을 소유할 수 없게 했다. 명백한 사적 소유권의 침해였다. 하지만 루즈벨트는 더 나갔다. 정부가 상품과 농산물의 생산량을 직접 조절해 생산과잉을 막는 한편 노동3법 보장 등으로 노동자의 임금과 권익을 지켰다.

반면, 같은 정부주도이긴 해도, 히틀러의 정책은 달랐다. 그가 내건 경제정책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 국영기업 민영화와 자급자족이었다. 이 두 정책은 모두 특이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 만했다. 루즈벨트와도 달랐지만 세계적 추세에도 맞지 않았다. '국영기업 민영화'는 확실히 '국가주도'라는 표현과 모순된 것으로 보였다. '자급자족'이라는 경제정책도 '보호무역'이라는 세계적 추세보다 훨씬 멀리 간 것이 분명했다.

■ 루즈벨트와 히틀러 ··· 같은 출발, 같은 정책

우선 국영기업 민영화를 보자. 당시 세계적으로는 국가가 직접 나서서 경제를 재건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그 과정에서 '기업 국유화'가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히틀러는 그 반대의 길을 갔다. 은행이나 철도, 조선, 해운 등 수많은 기업의 소유권을 국가에서 민간으로 이전시켰다. 왤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히틀러 정권이 갖는 파시즘의 성격을 읽을 수 있다. '파시즘'이란 흔히 '극우보수'를 지칭한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대기업과 연계된다. 즉, 히틀러와 대기업 간 끈끈한 관계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유럽은 러시아혁명을 겪으며 극심한 '레드 콤플렉스'를 겪는다. 독일 역시 1918년 11월의 사회주의 세력의 혁명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선다. 노동자의 반란과 혁명이 우려됐던 것이다. 독일 대자본은 반(反)공산주의 세력을 찾았고 히틀러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그러자 독일 대기업들은 히틀러와 나치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이는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파시즘과도 같은 맥락이었다. 결국, 국유기업 민영화는 히틀러 정권의 이 같은 '대자본과 결탁된 극우보수' 즉 파시즘의 성격을 알려주는 표지판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자급자족 정책도 히틀러의 특이한 점이라 할만 했다. 물론 대공황이 터지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대부분의 나라들이 빗장을 잠갔다. 당시도 지금도 이에 대해 쓰는 용어가 있다. '보호무역주의'라는 것이다. 관세를 올리고 자국통화가치를 떨어뜨려 다른 나라 제품은 막고 자기나라 제품은 팔려는 정책이다. 대부분의 나라가 이 같은 정책을 펴니 세계 무역은 곤두박질쳤고 훗날 역사가들은 이 정책이 대공황의 극복을 늦췄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히틀러는 여기서 한참을 더 나아갔던 것이다. 자급자족이라 했다. 뭐든 다른 나라와는 가급적 팔지도 사지도 않겠다는 얘기였다. 표면상 이유는 이랬다. 패전과 인플레에 이어 대공황으로 엉망이 된 독일경제였다. 만들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 상태에서 교역을 할 경우 엄청난 무역적자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문호를 완전히 막은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는 남유럽 등 독일의 영향권 아래 있는 나라들과의 교역은 계속했다. 필요한 물자는 어느 정도 충당이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루즈벨트와 히틀러의 경제정책에는 '정부주도' 외에 또 다른 공통점도 있었다. 특히 일자리 정책은 특기할 만하다. 정부가 자금을 들여 대규모 사회기반시설(SOC) 건설을 강력하게 추진했다는 점이다. 루즈벨트는 테네시유역개발, 히틀러는 아우토반 건설이라는 정권의 명운이 달린 사업을 펼쳤다. 일단 두 수반에게 1차로 주어진 기간은 4년이었다. 루즈벨트는 1936년 다시 선거를 치러야 했고 독일 의회가 히틀러에게 전권을 준 기간도 4년이었다. 결국 4년 뒤인 1936~37년 두 진영 두 수반의 정책은 그 결과를 만천하에 드러내야 했다.

히틀러 시대의 아우토반.
히틀러 시대의 아우토반.

결과는 어땠을까? 놀라웠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세계 최강국, 세계 최부국이었던 미국과 그 수반 루스벨트 '패(敗)', 패전에 따른 영토상실과 배상금 지급,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대공황이라는 날벼락까지 맞은 독일, 그리고 그 수반 히틀러 '승(勝)'이었다. 이는 실업률 비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1936년 기준 미국은 25% 전후였던 실업률이 약 16%로 여전히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독일은 달랐다. 30%대였던 실업률이 1937년 4%대로 거의 '완전고용'을 달성해 냈던 것이다.

이 사실만 놓고 보면 히틀러의 경제정책은 대성공을 거뒀다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히틀러는 누구에게나 '악(惡)'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칭찬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욕먹기 쉽다. 역사적으로 '히틀러의 경제정책 연구'가 미흡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놓고 얘기는 하지 않아도, 히틀러가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월등하게 대공황을 극복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이유? 여기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게 케인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주도의 대규모 공공사업 추진'이라는 경제정책은 케인스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주의할 게 있다. 루즈벨트의 '뉴딜'에는, 케인스가 직접 기획한 것은 아니라 해도, 확실히 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렇지 않다. 그의 경제정책에서 케인스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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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이코노텔링 대기자❙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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