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렬 부총리가 법제처장에게 전화 걸어 직접 스카웃 해
법안 마무리 되면 ' 가고 싶은 곳 보내주겠다 '고 선약까지
국회벽 못넘고 쓰루도 사망…전윤철"나는 낙동강 오리알"

쓰루는 독과점 상행위, 담합, 매점매석 등 불공정 상관행은 정부의 행정 조치나 세무조사 위협 등 협박성 '협조 요청'만으로 다스리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불공정 상거래를 일상적, 제도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엄정한 공정거래법이라고 생각하고 그 제정을 꾀하고 있었다.
기획원에 의한 공정거래법 제정 시도는 쓰루가 부총리가 되기 전에 이미 국회에 제출된 것만 해도 1966년 4월, 1969년 4월에 두 차례 있었다. 그런 실패 사례를 염두에 두어도 1971년은 공정거래법 제정에 좋은 여건을 마련해주고 있었다. 그해 9월 국회와 언론은 '물가가 이렇게 오르고 있는데 정부는 뭐하고 있느냐'고 성토하고 있었다. 이에 기획원은 1969년 이후 책상 서랍에서 잠자고 있던 공정거래법안을 깨웠다. 10월 국무회의를 거쳐 국회에 제출된 그 법안(전문 30조와 부칙)은 첫째, 독과점 업체의 부당 행위를 지정 및 규제하고, 둘째, 경쟁 제한 행위를 제재하며, 셋째, 독립된 공정거래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실무적으로 이 법안의 작성을 책임진 사람은 법제처에서 '차출'된 전윤철 사무관이었다. 거기에 얽힌 사연. 그는 법제처에서 꽤 날리던, 과장 진급을 눈앞에 둔 사무관이었다.
그런데 1971년 가을 어느 날, 위에서 기획원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쓰루와 당시 물가정책관이었던 서석준 씨 등이 공정거래법 제정을 위해 부처들을 수소문해보니, 법제처에 똑똑한 사무관이 하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쓰루가 바로 전화통을 들어 법제처장과 통화를 한 것은 불문가지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부총리 집무실에 들어간 그에게 쓰루는 "공정거래법을 제정하는 실무 책임을 맡으라"며 그 법이 왜 제정되어야 하는지, 얼마나 자신이 그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설명하고 특히 "일을 잘 마무리하고 나면 당신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보내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 불철주야 작업 끝에 법안을 작성하여 국회에 제출한 단계에까지 이르렀는데, 전 사무관의 '뒤를 봐줘야 할' 쓰루가 72년 초 부총리를 사임하고 병원에 입원하더니 얼마 안 가서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쓰루 한 사람 믿고 '장래가 보장된' 법제처에서 기획원으로 옮겨 온 전사무관은 (그의 표현대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이 얘기를 필자에게 전하던 전윤철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은 "그때 법제처에 있었으면 내가 벌써 장관을 하고 있었을 거야. 당신 아버지 때문에 내 신세 조졌어"라며 쓰루에 대한 섭섭함과 불만을 볼멘소리로 토로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발탁해준 쓰루에 대한 그 나름의 감사 표시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필자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법안은 업계와 일부 언론의 반대와 기획원의 법 제정 의지가 약하다는 학계의 비판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국회의 심의 유보로 해를 넘겨 폐기되고 말았다. (공정거래법 제정은 1980년에 들어선 두 번째 군사정권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아이히만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긴축을 몰아붙였고, 그 덕분에 오래간만에 물가가 안정되어 언론을 긴축정책의 동지로 돌릴 수 있었던 쓰루의 안정정책. 1971년 가을에 들어서 그 모멘텀은 확연히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