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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⑥ 히틀러와 루즈벨트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⑥ 히틀러와 루즈벨트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2.03.1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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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토반 본격 건설에 나선 히틀러는 '일자리 창출'로 국민의 신뢰 얻어
같은 시기에 루즈벨트 대통령 당선돼 히틀러와 경제 재건 '판박이 정책'
이혼소송서 승리한 채플린,새 연인과 자유 구가하며 '모던 타임스' 기획

히틀러는 '악(惡)의 정점'이다. 젊은이 56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이었다. 게다가 게르만 민족주의를 앞세워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다. 그가 갖고 있던 이 '악의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독일 국민'이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의 '배고픔'을 해결해 줬고 그로 인해 그들의 무한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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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지나지 않아 이 거대한 일은, 우리의 의지와 산업, 능력, 그리고 우리의 투지를 증명해 줄 것입니다. 독일의 일꾼들이여, 이제 일터로 가십시다, 일을 하십시다!"

1933년 9월 23일 토요일 오전.

프랑크푸르트의 한 공사장에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700명의 독일 노동자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이들 앞에서 이렇게 힘차게 외친 이는 다름 아닌 히틀러. 연설을 마치고는 곧장 공사 현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삽을 들어 땅을 팠다. 그의 '삽질'은 그저 세리머니를 위한 '폼잡기' 수준이 아니었다. 군복 차림의 그는 실제 일꾼이나 군인처럼 힘차게 삽질을 했다. 그러자 지켜보던 노동자들이 열광했다. 수 백 명의 노동자들이 삽을 들고 주변에 진을 쳤다. 그리고 함께 땅을 파기 시작했다. 히틀러와 노동자들은 하나인 듯 보였다.

아우토반 공사 현장에서 ‘삽질’하는 히틀러.
아우토반 공사 현장에서 '삽질'하는 히틀러.

독일이 자랑하는 '속도제한 없는 고속도로' 아우토반(Autobahn)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그의 말은 '진짜' 현실로 이뤄졌다. 2년도 채 되지 않은 1935년 5월 13일 프랑크푸르트의 암만에서 다름슈타트까지 4차선 고속도로가 완성된 것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우토반의 건설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된 1942년까지 10년 동안 독일 곳곳을 연결하는 3800km의 도로가 만들어졌다.

사실, 아우토반은 히틀러의 기획 작품이 아니었다. 공사는 이미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 독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정부는 돈이 없었고 경제는 엉망이었다. 패전에 따른 엄청난 배상금과 그를 갚기 위한 과도한 통화발행, 그리고 그에 따른 하이퍼인플레이션의 파도가 전 독일을 덮쳤다. 일이 잘 될 리 없었다. 히틀러의 등장 전 아우토반은 쾰른과 본, 뒤셀도르프를 잇는 짧은 구간에 한정돼 있었을 뿐이다.

아우토반 건설을 밀어붙인 건 히틀러였다. 이유? 전쟁 도로를 닦기 위해? 원활한 물류를 위해? 아니다. 히틀러 제1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지금 우리는 모두 안다. 왜 정부가 엄청난 돈을 들여 사회기반시설(SOC)를 건설하는지. 그래, 경기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다. 이 둘 중 하나를 꼽는다면? 경기 활성화일까, 일자리 창출일까? 정부가 처한 상황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의 목표는 분명했다. 공사의 최대 목적은 '일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연설 중인 루즈벨트.
연설 중인 루즈벨트.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역사에는 숱한 우연이 있다. 그중에는 의미를 곱씹을 만한 것도 있다. 1933년의 '우연'도 그렇다.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서로를 치고받으며 전쟁을 이끈 두 주역이 이 해 초 권력의 핵심에 들어선다. 전체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자유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가 그들이다. 그들의 권력 입성 시기와 그들이 처한 상황, 그리고 그들이 펼친 정책은 그야말로 판박이다. 일단 권력 장악 시점을 보자.

연설 중인 루즈벨트와 히틀러(사진) 거의 동시에 권좌에 오른 이 둘에게 국민은 무너진 나라 경제를 살릴 것을 요청했다.
연설 중인 루즈벨트와 히틀러(사진) 거의 동시에 권좌에 오른 이 둘에게 국민은 무너진 나라 경제를 살릴 것을 요청했다.

➀ 1932년 11월 6일 독일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제1당의 지위를 차지한다.

➁ 이틀 뒤인 1932년 11월 8일, 민주당 소속 루즈벨트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다.

➂ 약 두 달 반 뒤인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한다. 그리고 이틀 뒤인 1933년 2월 1일, 그는 수상 취임 연설에서 "4년 안에 독일 농부를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고 실업을 완전히 극복하겠다"고 선언하며 이른바 '4개년 경제계획'을 발표한다.

➃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1933년 3월 4일 루즈벨트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우리의 가장 큰 임무는 사람들을 일하게 하는 것"이라 말하며 긴급 경제정책인 '첫 100일 정책(The First 100 Days)'을 펼친다.

➄ 20일 뒤인 1933년 3월 23일, 독일 의회는 '권한실행법(Enabling Act)'을 통과시켜 히틀러 내각에 향후 4년 동안 의회 동의 없이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엄청난' 권한을 부여한다. 이로써 히틀러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전권을 장악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기틀이 되는 이 모든 일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에 이뤄졌다. 1932년 11월부터 1933년 3월까지다. 전체주의와 자유주의 두 진영을 대표하는 두 수반(首班)은 '구원투수'의 성격이 짙었다. 두 진영, 아니 세계 모두가 경제 붕괴의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9년 10월 24일 미국 월가를 진원지로 시작된 초대형 지진이 전 세계를 강타했던 것이다. 패전으로 지반이 약할 대로 약해진 독일의 피해는 진원지 미국보다 더 컸다. 1933년 초 기준, 미국은 4명 중 1명이, 독일은 3명 중 1명이 실업자였다.

참고로 우리는 당시 세계를 호령했던 또 한 명의 수반 찰리 채플린의 일정도 봐야 한다. 그는 그야말로 세계 영화계의 '으뜸'이었다. 보자. 루즈벨트와 히틀러가 목숨 걸고 달려들어 대성공을 거둔 1932년 가을, 채플린도 승리의 샴페인을 터뜨렸다. 그해 10월 26일 그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두 번째 부인 리타 그레이(Lita Grey)와의 소송에서 승리했던 것이다. 나이 겨우 열다섯 소녀를 임신시켜 어쩔 수 없이 결혼한 채플린이었다. 그러고도 바람을 피웠다. 이 소송으로 명예는 물론 전 재산을 빼앗기는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소송에서 승리한 그는 이로써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됐다. 만난 지 3개월 된 스물 두 살의 풋풋한 폴레트 고다드(Paulette Goddard)와의 사랑도 맘 편하게 즐길 수 있었다. 반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33년 3월, 갓 취임한 루즈벨트는 대공황에서 나라를 건지겠다며 온갖 실험적 정책을 늘어놓고 있었다. 국민은 불안과 두려움을 억눌렀다.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플린은 이미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새 연인과 자유를 만끽하며 새 영화 <모던 타임스> 기획에 들어갔다. 거액을 들여 새로 산 요트에서. 그레이와의 소송에서 졌다면 요트 구입비는 아마 그녀의 통장에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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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이코노텔링 대기자❙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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