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로실과 가정병실까지 갖춘 '문화주택' 인기 폭발해
100년전 지방지주들 봄에 땅 팔아 서울 집 매수 열기
"나는 우리 가정에는 제일 조선 부엌의 정결치 못함은 실로 위생에 위험한 줄 알고 먼저 나의 가정에서 이 개량을 시험하기 위하여 엄중한 감독하에 여러 가지로 힘을 들이고 있다. 그래서 부득이 지금 있는 양옥집을 신축하고 식사는 요리사를 고용하여 항상 서양음식을 먹기로 하였다."
1915년 《매일신보》에 실린 매국노 '백작' 이완용의 말이다. 그가 이후 평생 서양 음식만 먹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식 가옥이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부엌, 화장실등이 불결하다는 사실은 당시 식자들 대부분이 공감하던 바였다.
때문에 1915년 매일신보사와 경성일보사 등이 주최한 '가정박람회'에서 선보인 '문화주택'은 그야말로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깨끗한 화장실과 욕실, 널찍한 부엌, 주부실과 양로실에 가정병실까지 갖춘 '문화주택' 전시물은 상류사회 규수들이 몰려와 구경했을 정도였다. 이런 현상은 갈수록 더해 1930년대 잡지 《별건곤》이 실시한 '백만 원이 생긴다면 우리는 어떻게 쓸까'란 설문조사에 응한 어느 '웨이트리스'의 소원도 문화주택이었다.
이런 인기를 노려 1932년 지금의 종로 2가에 있던 화신상회 박흥식 사장은 스무 평짜리 문화주택을 경품으로 내걸기도 했다. 종로통의 상권을 두고 바로 옆의 동아백화점을 누르기 위한 전략이었는데 '문화주택' 경품행사로 큰 타격을 입은 동아백화점은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문화주택열이 갈수록 뜨거워지면서 일본인 투기꾼 시마 도쿠조가 수십 배의 차익을 얻은 '신당리 토지매매사건'이 벌어지는가 하면 집값도 천정부지로 뛰었다. 192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른 평짜리 집값은 평균 900원 정도였던 것이 1930년대 들어 서른 평짜리 문화주택 가격이 6,000원에 이를 정도로 폭등했다.
집값이 뛰니 시세차익을 보려는 이들도 자연 늘었다. 돈깨나 있다는 지방지주들이 경성으로 몰려들었다. 한데 지주들은 봄에 농지를 매매하는 관행이 있었으니 그 땅 판 돈을 들고 와 경성의 집을 사 대는 바람에 봄이면 경성의 부동산값이 뛰는 웃지 못할 현상도 나타났다고 한다.
이 지경이 되자 애가 탄 것은 가진 것 없는 월급쟁이들. 이들을 위해 유명 잡지에선 "주택문제를 해결하려면 그만한 노력을 들여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 제도하에서는 공수(空手)로 무엇을 꿈꾸기는 어렵다"면서 '주택자금 확보 비법'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 모두 일제강점기 서울 풍경을 스케치한 《경성리포트》(최병택·예지숙 지음, 시공사)에 소개된 내용으로 이를 보면 부동산 투기, 나아가 사람 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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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