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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4) 대공황'모던 타임스'⑦파시즘 대항마 '인민전선' 구축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4) 대공황'모던 타임스'⑦파시즘 대항마 '인민전선' 구축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1.12.08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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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위기 느낀 스탈린과 소비에트, 지식인ㆍ 도시 거주 소시민ㆍ농민ㆍ 빈민 등 계층 총결집
스페인 내전에 스탈린은 인민전선,히틀러ㆍ무솔리니는 극우 프랑코 지원해 2차 세계대전 '전초전'
1919년 미국에도 공산당(CPUSA)출범…대공황 터져 '자본주의 붕괴' 점쳐지는 등 기존질서 위협

<모던 타임스>가 개봉된 것은 1936년 2월이었다. 개봉 전부터 영화가 공산주의에 우호적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그럼에도 채플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일부 사람이 스토리만 보고 하는 얘기라 치부했다. 하지만 상황은 좋이 않았다. 미국과 유럽에는 공산주의의 새로운 적 극우 '파시즘'이 등장, 좌우 갈등이 극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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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유럽과 미국의 공산주의 세력은 고무됐다. 자국도 프롤레타리아혁명이 가능할 것 같았다. 반면 기득권 세력은 달랐다. '적색 공포'에 시달렸다. 노동자의 정당이라니, 국가가 부자들의 것을 빼앗아 가다니···. 반발은 당연했다.

선두 주자는 이탈리아 무솔리니. '공산주의자 일망타진'을 외치며 권력을 잡았다. 1922년의 일이었다. 그는 대기업과 금융자본도 끌어들였다. 그리고 국가주의, 민족주의, 전체주의, 반(反)공산주의를 외쳤다. 세상은 이들을 '파시스트'라 불렀다. 대기업과 손잡고 노동자를 탄압하는 극우세력이었다.

스탈린과 소비에트는 여기까지는 그나마 괜찮다 생각했을 것이다. 겨우 이탈리아였다. 유럽에서의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10년이 지나자 얘기가 달라졌다. 더 센 '한 방'이 터져 나왔다. 무솔리니를 벤치마킹한 히틀러였다. 1933년 그는 독일에서 정권을 잡았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프랑스도 있었다. 1936년 총선을 앞두고 극우세력이 파시스트 정치조직을 갖춰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무솔리니나 히틀러 등 기존 파시스트 세력도 이들을 지원했다. 스탈린과 소비에트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 뭔가 해야 했다. 그것도 급하게.

1935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7차 코민테른. 이 대회에서 제시된 ‘인민전선’은 이후 세계 주요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주요 전략이 된다.
1935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7차 코민테른. 이 대회에서 제시된 '인민전선'은 이후 세계 주요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주요 전략이 된다.

그 유명한 '인민전선(the People's Front)'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내용은 간단했다.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 '힘'을 모으라는 것이었다. 분열된 내부는 봉합하고 외부 세력과도 연합하라는 것이었다. 이 '외부 세력'에는 지식인, 도시 거주 소시민, 중소 부르주아, 농민, 빈민 등 다수 계층이 포함돼 있었다. 의제는 1935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7차 공산주의 세계대회 코민테른(Comintern=Communist International)에서 정식으로 제기됐다.

대회를 주관한 불가리아 출신 정치인 G.M. 디미트로프(Dimitrov)는 "트로이카의 목마를 생각하라"고 주문했다. 전략은 바로 효과를 봤다. 프랑스를 보자. 내분이 심각했던 사회당과 공산당이 하나로 뭉쳤고 반목하던 각 계층이 단합했다. 1936년 선거에서의 승리는 거의 전적으로 '인민전선' 덕이었다.

■ 좌우의 승패 뒤바뀌며 일어난 스페인 내전

스페인에서의 인민전선 사례는 훨씬 복잡했다. 스페인의 역사를 잠시 훑어보자. 1873년 첫 공화정 출범 이후한 정국은 한시도 평온할 날이 없었다. 공화정과 왕정, 좌파와 우파, 가톨릭과 개신교, 지주와 농민, 자본가와 노동자 등 수다한 갈등 집단들이 사분오열에 이합집산을 거듭했던 결과다. 좌파 내 분열도 심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에서 제시된 인민전선 전략은 좌파의 단합을 이끌었다. 스페인사회주의노동자당, 좌파공화파, 스페인공산당 등 분열됐던 좌파가 '인민전선'이란 이름으로 하나가 됐고 이로써 1936년 2월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의회 과반 획득에 실패했던 것이다. 헌법에는 의원 수 절반을 넘어야 집권당이라 했다. 중도파 의원을 영입할 필요가 있었다. 좌파 내부에서 갈등이 불거졌다. 급진파들이 헌법을 무시한 채 내각을 발표했다. 토지개혁 등 급하게 좌파 정책을 밀어붙이기도 했다. 반발은 당연했다. 군대가 일어났다. 총사령관이었던 프란시스 프랑코(Francisco Franco)가 앞장을 섰다. 내전이었다. 기득권층과 파시스트들이 그의 손을 들어줬다. 외부 지원도 있었다. 스탈린은 인민전선을,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프랑코를 밀었다. 이런 이유에서 3년 간 계속된 이 내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라 불리기도 한다.

자, 이제 미국을 보자. 1936년이면 루즈벨트 정부 1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이었다. 1933년 3월 취임한 루즈벨트는 이제 또 한 번의 선거를 치르며 자신의 업적을 평가받아야 했다. 1929년 10월 24 '암흑의 목요일' 이후 미국경제는 어땠는가. 한 마디로 초토화됐다. 1929년 8월부터 1933년 3월까지 GDP가 26.7%나 쪼그라들었다. 다른 걸 떠나 3명 중 1명이 실업상태였으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신임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이 '뉴딜(New Deal)'이라 불리는 혁신적 정책을 펼쳤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치ㆍ사회도 잘 돌아갈리 없었다. 빈부격차와 사회ㆍ이념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혁명적이기까지 한 '뉴딜'정책은 호평을 받을 만 했다. 하지만 모두가 박수를 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도 파시즘과 공산주의 간 충돌이 있었다. 우선 기득권층을 보자. 이들은 변화도 '뉴딜'도 싫어했다. 부유한 기업인, 그리고 이들과 뜻을 함께 한 정치인들은 1934년 미국자유동맹(American Liberty League)을 결성해 루즈벨트에 저항했다. 연방대법원도 이들에 동조했다. 법원은 1933년과 1934년 의회를 통과한 법률 중 11개 법률을 '위헌'이라 판결했다. 이중에는 농업조정법이나 국가산업부흥법 등 뉴딜의 핵심 법률도 포함돼 있었다.

파시스트들의 움직임도 무시할 수 없었다. '카키셔츠(Khaki Shirts)'나 '실버셔츠(Silver Shirts)', '공화국의 파수병(Sentinels of Republic)' 등이 그들이었다. 극우에 정치적ㆍ폭력적이었다. 이들은 노동세력을 약화시키고 강압적 독재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자유동맹'이 파시스트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친화력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두 집단의 결탁은 어렵지 않았다. 무솔리니나 히틀러처럼 폭력적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할 수도 있다 생각했다. 1934년 말 이들은 대대적인 시가행진을 계획했다. 목적은 당연히 정권 탈취였다.

1936년 미국 뉴욕에서 개최된 제9회 미국공산당대회. 얼 브라우더(Earl Browder) 당 대표는 이날 기조연설을 통해
1936년 미국 뉴욕에서 개최된 제9회 미국공산당대회. 얼 브라우더(Earl Browder) 당 대표는 이날 기조연설을 통해 "민주주의 또는 파시즘: 중앙위원회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들의 적, 미국 공산주의자들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한껏 고무된 이들이었다. 1919년에는 미국에도 정식으로 공산당(CPUSA)이 출범했다. 미국의 '적색공포'는 이때 이미 씨앗이 뿌려졌다. 거기에 대공황마저 터졌다. 자본주의가 곧 붕괴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힘껏 외치며 미국의 기존 질서를 위협했다. 1930년대 중반 이들의 활동은 더욱 두드러졌다, 루즈벨트 정부의 출범과 함께 파시스트들이 난립한 탓이다. 1934년 미국 반전파시즘 연맹(The American League against War and Fascism)을 창설, 파시스트들과의 전면전을 준비했다.

이들의 전진은 계속됐다. 곧 대선이 있었다.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소비에트의 지시가 있었다. '인민전선'을 구축하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광범위한 대중과 지식인을 끌어 모았다. 노동자, 농민, 흑인, 진보 지식인, 도시 중소 부르주아지···. 그리고 제3의 정당 창당을 추진했다. 1935년 5월 미네소타 노동당의 주도 아래 전국대회를 개최해 1936년 선거에서 후보를 내려 했던 것이다. 당시 노조 지도자들이 소비에트가 아닌 루즈벨트의 손을 들어줘 실패로 끝나기는 했어도 미국 내 전통 부호나 파시스트들은 가슴을 쓸어내릴 만 했다.

결론적으로 1936년 미국 대선정국은 진보-보수 양당주의 특성을 보여준 이전까지의 선거와 달랐다. 극우 파시스트들과 기득권 보수파, 루즈벨트 편에 선 현실주의 노조 지도자들, 그리고 소련과 유기적으로 소통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기괴하고 복잡했다. <모던타임스>는 이 같은 정치ㆍ사회 환경의 한 복판에서 개봉됐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예민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기괴하고 복잡한 상황은, 시간 상, 한 점에서 출발했다. 1929년 10월 24일 주가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이었다. 대공황이 세계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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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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