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4:00 (금)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4) 대공황'모던 타임스'⑥ 채플린, '공산주의자' 낙인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4) 대공황'모던 타임스'⑥ 채플린, '공산주의자' 낙인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1.12.06 0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36년 '모던 타임스'는 개봉하자마자 대박났지만 ' 파시즘 ' 득세에 곤욕
무솔리니, 히틀러에 이어 프랑스서도 극우파 급성장해 좌파에 일격 가해

채플린은 『사회신용론』을 읽고 '기계'에 대한 더글러스의 생각에 매료된 것으로 보인다. 기계에 대한 채플린의 말에는 더글러스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다. 영국에서 간디를 만나 나눈 얘기도 주로 기계에 대한 것이었다. 영화 <모던 타임스>의 밑바닥에는 이처럼 더글러스와 '사회신용론', 그리고 기계에 대한 그의 사상이 깔려있다 할 수 있다.

-------------------------------------------------------------------

<모던 타임스> 제작이 본격 시작된 것은 1933년이었다. 그해 3월 25일 <모던 타임스>에 대한 첫 번째 작업 기록이 남아 있다. 새 요트에서 새 사랑 고다드와 행복한 시간을 즐기던 때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934년 10월 촬영이 시작됐고 1년이 지날 무렵 모든 작업이 완료됐다. 1935년 12월에는 시사회를 가졌고 1936년 2월 영화는 마침내 세상에 첫 선을 보인다. 영화는 개봉하자마자 화제를 모았다. 엄청난 관객을 끌어 모았다.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개봉 첫 주 기록적인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며 "개봉 첫 주 최고 기록이었다"고 썼다. 당연히 돈도 많이 벌었다. <모던 타임스>는 그해 180만 달러를 벌어들인다. 개봉된 그해 최고 흥행작이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다. <모던 타임스>가 그에게 좋은 것만을 준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밝혀질 일이겠지만, 채플린은 이 영화로 치명상을 입는다.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히는 데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줬던 것이다. 개봉 전부터 이미 그 전조(前兆)가 보였다. 제작 기간 중에 채플린이 공산주의 영화를 만든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채플린은 이에 대해 자서전에서 "신문에 보도된 영화 줄거리만 읽고 이런 기사를 내보냈다고 생각했다"고 썼다. 또한 자서전 다른 곳에서는 "일부 평론가들은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것도 반대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도 했다. 채플린은 당시 이 같은 루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상황은 채플린의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모던 타임스>가 개봉됐던 1936년이면 러시아에서 '붉은 혁명'이 일어난 지 20년이 지난 해였다. 1930년대 중반, 채플린과 <모던 타임스>, 그리고 공산주의와의 관계를 알려면 러시아혁명 이후의 이 20년 역사를 들춰봐야 한다. 이 역사를 모르면서 채플린ㆍ<모던 타임스>ㆍ공산주의의 관계를 얘기한다는 것은 무리다.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기 쉽다. 특히 영화가 개봉된 1936년을 염두에 둬야 한다. 세계경제는 여전히 대공황을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고 미국은 11월 3일의 대통령 선거를 준비 중에 있었다.

■ <모던 타임스>가 공산주의 찬양 영화?

일단 혁명 이후 공산주의의 움직임을 보자.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다음 세 가지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는 스탈린이 제창한 새로운 공산주의 이론인 '일국 사회주의'이며 둘째는 공산주의를 제1의 적이라 생각하는 파시즘의 등장과 그 세력 확장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29년 주가 폭락과 함께 시작된 대공황을 봐야 한다.

1922년 4월 3일 러시아 공산당 제11차 대회에서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된 직후 레닌과 함께 한 스탈린
1922년 4월 3일 러시아 공산당 제11차 대회에서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된 직후 레닌과 함께 한 스탈린

'일국 사회주의(Socialism in One Country)'란 스탈린에 의해 '교묘하게 변형된 마르크스주의'라 할만하다. '교묘하다'는 표현은,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닌 러시아의 자신의 세력 확장을 교묘하게 포장된 이론임을 뜻한다. 마르크스ㆍ레닌주의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 및 권력 획득, 그리고 이들, 즉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거쳐 성립된다. 이 논리대로라면, "세계 각국은 성공할 때까지 혁명을 시도해야 한다"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이 맞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 논리를 바꾼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없이도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획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근거는 러시아 그 자체였다. "이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나라가 있고 그 나라의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1924년 12월 스탈린이 직접 쓴 한 신문 논설에서 시작됐다. 이론 측면에서 그의 내공(內功)은, 실상 레닌은 물론이요 그가 이후 처형할 부하린이나 트로츠키만도 못 했다. 하지만 실세였다. 레닌의 후계자로, 1922년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된 그였다. 취임 한 달 뒤 레닌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그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거의 1인자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해 12월 출범한 소비에트연방은 대부분 그의 공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2년이 채 못 된 1924년 1월 레닌이 죽었다. 이로써 스탈린은 마침내 러시아 최고 권력자가 됐다. 그가 '일국 사회주의'를 발표한 것은 그해 12월이었다. 논리나 이론은 뒷전이었다. 새로 등극한 최고 권력자의 주장이었다. 곧 법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적을 만난다. 파시즘이었다.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던 무솔리니가 어느 날 갑자기 '사회주의 타도'를 외치더니 1922년 10월 28일 5만 명의 파시스트를 이끌고 '로마의 진군'을 통해 정권을 잡았다. 그때만 해도 그는 나이 40도 안 된 애송이로 보였다. 하지만 수 년 뒤 그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권력 장악 전후 그는 피아트 등 대기업과 손을 잡아 노동자를 억압하며 힘을 키웠다. 파시스트는 1926년 모든 정당을 '불법'으로 규정할 정도의 힘을 갖게 됐다. 유럽 최대 규모의 이탈리아 공산당도 이때 와해됐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시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투옥된 것도 이때였다.

1922년 10월 28일 ‘로마의 진군’을 통해 정권을 잡은 무솔리니
1922년 10월 28일 '로마의 진군'을 통해 정권을 잡은 무솔리니

파시즘은 이탈리아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10년이 지났다. 이번에는 독일이었다. 무솔리니의 열렬한 추종자요 그에게 많은 것을 배운 히틀러가 등장했다. 그가 독일 정계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 일이었다. 1920년, 짧게 '나치(Nazi)'로 불리게 되는 정당,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을 창설하면서부터였다. 이후 히틀러는 10년 이상의 우여곡절을 겪은 뒤 1933년 마침내 정권을 장악했다. 그해 수상이 됐고 의회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 그는 '제3제국'을 선포하며 마침내 준(準)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1934년 8월 19일 그는 '총통'이 됐다.

새로 출범한 공산주의 진영, 즉 소비에트연방(소련)은 히틀러의 등장에 아연실색한다. 공산주의를 적으로 모는 파시즘이 이탈리아에 이어 독일까지 장악했음을 의미했던 것이다.

1934년 8월 2일 독일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그 바톤을 이어 대통령이 됐지만 한 달도 안 돼 전권을 위임받으며 새로 만든 직함 ‘총통(Führer)’이 됐음을 선포한 히틀러
1934년 8월 2일 독일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그 바톤을 이어 대통령이 됐지만 한 달도 안 돼 전권을 위임받으며 새로 만든 직함 '총통(Führer)'이 됐음을 선포한 히틀러

이때까지만 해도 히틀러를 무솔리니의 단순 추종자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그는, 무솔리니처럼, 공산주의를 탄압한다. 노동조합과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임금을 동결한다. 유럽에서 파시즘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스탈린은 이미 '일국 사회주의'를 선언한 상황이었다. 소련이 세계 공산주의의 후원자요 맏형임을 선포했던 것이다. 이제 스탈린에게는 자본주의 붕괴보다 파시즘의 퇴치가 더 중요했다.

그런데 엎친데 덮쳤다. 프랑스에서 역시 파시스트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프랑스의 극우세력은 1889년의 블랑제 사건과 1894년 드레퓌스 사건으로 급성장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이들도 '큰 꿈'을 꿨다. 1936년 선거를 대비해 '프랑스연대(Solidarité Française)'나 '프랑시스메(Francisme)', '불의 십자가(Croix de Feu)' 등 정치 성향이 강한 조직이 새로 결성됐다. 이들이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후원을 받은 것은 물론이었다. 1934년 한 유대인 사업가의 뇌물 스캔들을 계기로 우익 정당들과 파시스트들이 펼친 대대적인 시위는 공산당과 사회당 등 좌파에게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악몽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좌파의 맏형 소련과 그 지도자 스탈린은 좌불안석이었다. 뭔가 행동으로 나서야 할 때였다.

------------------------------------------------------------------------------

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 229번지 (서울빌딩)
  • 대표전화 : 02-501-63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장재열
  • 발행처 법인명 : 한국社史전략연구소
  • 제호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 등록번호 : 서울 아 05334
  • 등록일 : 2018-07-31
  • 발행·편집인 : 김승희
  • 발행일 : 2018-10-15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이코노텔링(econotelling). All rights reserved. mail to yunheelife2@naver.com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장재열 02-501-6388 kpb11@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