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1 21:30 (화)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3) 마부제박사⑨맥주홀 폭동과 히틀러의 등장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3) 마부제박사⑨맥주홀 폭동과 히틀러의 등장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1.10.18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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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루르지방 점거, 獨국민 반감 절정 … '배상 조약' 무효 외치며 '파업 저항'
전쟁에 졌다고 인정 안한 히틀러, 32세 나이에 '나치 당권' 잡고 맥주홀서 쿠데타
獨화폐개혁으로 超인플레 진정 … 산업시설 초토화된 프랑스는 국가채무로 휘청

나라 총생산의 2.5배에 이르는 배상금. 독일은 어차피 감당하기 어려웠다. 미친 듯 돈을 찍어 달러와 금을 사려 했지만 통화가치 하락으로 원하는 만큼 사지 못했다. 그러자 프랑스가 행동에 나섰다. 독일의 알짜배기 산업지대 루르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석탄이나 철광석 등 자원으로 자기 몫에 해당되는 배상금을 챙기겠다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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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게 루르는 생명줄이었다. 석탄자원의 85%, 철강ㆍ선철 생산량의 80%가 이곳에서 나왔다. 프랑스와 벨기에가 이곳을 점령하자 국제사회가 요동쳤다.

우선 외환시장이 크게 흔들렸다. 독일이 또 엄청난 돈을 뿌릴 게 확실시 됐기 때문이다. 1922년 크리스마스 때 달러 당 7700마르크였던 환율은 침공 다음 날 1만500마르크로 뛰었고 1923년 1월 말에는 5만 마르크를 넘어섰다. 독일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물가가 다시 한 번 뛰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 1923년 10월 한 달 사이 물가가 300배 올랐다. 1920년대 초 독일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정점이었다.

미국과 영국은 분노했다. 독일이 당장의 배상금을 갚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은 독일 및 유럽의 안정을 원했고 그러기 위해 채무 재조정 얘기도 오갔다. 그런데 루르 점령이라니! 이 사건을 계기로 독일의 과도한 배상금 문제는 다시 한 번 도마 위에 올랐다.

당시 미국은 정권 교체기였다. 1921년 3월 윌슨의 뒤를 이어 워런 하딩(Warren Harding)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그해 연말 독일의 배상금 문제를 재검토하기 위해 '연합군 배상 위원회(Allied Reparations Commission)'를 출범시켰다. 위원장은 하딩 정부의 초대 예산 국장인 찰스 도스(Charles G. Dawes). '도스플랜(Dawes Plan)'으로 불리는 이 위원회 계획은 독일의 배상금 부담을 상당히 완화시켰다. 그의 계획은 연합국과 독일 모두의 호평을 받으며 1924년 7월 정식 채택된다.

■ '맥주홀 폭동'으로 세계적 인물 된 히틀러

하지만 프랑스의 루르 지역 점거부터 도스플랜이 나올 때까지 독일은 정치ㆍ사회적으로도 극도의 혼란을 겪었다. 연합국, 특히 프랑스에 대한 독일 국민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루르 지역의 노동자와 주민은 파업과 태업으로 저항했다. 적잖은 대중은 거리로 뛰쳐나와 '프랑스 타도'와 '베르사유조약 원천 무효'를 외쳤다. 그럼에도 내부 단합은 어려웠다. 좌우가 합쳐 힘을 모으자는 파와 각자의 활동을 주장하는 파 간 파벌 싸움이 치열했다. 그중 눈에 띄는 자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 용사로 1920년 3월 군을 나와 정치에 뛰어들며 자신의 입지를 굳혔던 인물, 바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였다.

1923년 10월 독일 뮌헨에서 터진 ‘맥주홀 폭동’과 여기에 참여한 군인들. 나치당 당수 히틀러가 주도한 이 폭동에는 독일 군인들까지 동참, 혁명과 쿠데타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1923년 10월 독일 뮌헨에서 터진 '맥주홀 폭동'과 여기에 참여한 군인들. 나치당 당수 히틀러가 주도한 이 폭동에는 독일 군인들까지 동참, 혁명과 쿠데타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그는 본래 베르사유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독일이 전쟁에 졌다는 사실조차 인정할 수 없었다. 독일은 인종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세계 최고ㆍ최강이라는 믿음이 지나치게 강했던 탓이다.

따라서 그가 "전쟁에서의 패배는 공산주의자나 노동자 등 내부 배신자의 소행"이라는 당시 유행했던 대중의 말에 불을 붙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해 보였다. 탁월한 정치능력을 보여준 그는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1921년 7월 불과 서른 둘 나이에 이른바 '나치(Nazi)' 당으로 불리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의 당권을 잡았다. 그리고 혼란기 권력투쟁의 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그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것은 1923년 가을이었다. 그해 초 프랑스가 루르를 점령하자 격분한 그는 무능한 정부를 질타하며 '타도 프랑스'를 외쳤다. 그리고 약 10개월 뒤인 11월 8일과 9일 그는 맥주홀에서 군중을 선동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게 이른바 '맥주홀 폭동(Bürgerbräu-Putsch)'다.

그러나 실패한다. '실패한 쿠데타'는 감옥행이다. 그리고 감옥에서 그 유명한 『나의 투쟁(Mein Kampf)』을 쓴다. 그는 이 일로 세계 언론의 1면 톱을 장식하며 비로소 세계적인 인물로 거듭난다.

1923년 화폐개혁은 또 하나의 거대 사건이었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잠재우기 위해 1923년 10월 13~15일 독일 의회는 마침내 화폐개혁법을 통과시킨다. 새로운 화폐는 렌텐마르크(Rentenmark). 비록 금으로 태환되지는 않지만 금과 연계된 채권인 '금채권(Gold Bond)'에 연계돼 있어 아무렇게나 찍을 수 있는 종이 마르크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렌텐마르크는 그해 11월 기존 종이 마르크와 1조 대 1비율로 교환됐다. 렌텐마르크의 위력은 대단했다. 새 돈이 나온다는 말과 함께 인플레이션이 거짓말 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1920년대 초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막을 내린다.

■ 국가 파산에 몰린 프랑스, 독일 추궁

여기까지가 1920년대 독일 하이퍼인플레션의 일반론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는 게 필자 생각이다. 더 깊은 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문을 던져보자. 왜 프랑스는 그토록 집요하게 독일을 낭떠러지로 몰고 갔던 것일까? 전쟁에 따른 실질적인 피해, 그리고 50년 전 보불전쟁의 패배와 굴욕에 따른 복수심? 맞다.

하지만 하나가 더 있다. 프랑스 자신도 파산으로 몰려갔다는 사실이다. 당시 프랑스도 절박했다. 프랑스도 빚이 있었다. 그리고 그 빚을 갚아야 했다. 그런데 돈이 없었다. 독일로부터 배상금을 받지 못하면 프랑스도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

1923년 11월 화폐개혁으로 등장한 렌텐마르크. 기존의 파피마르크와 1조 대 1로 교환됐던 이 화폐로 악명 높았던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마침내 끝을 맺었다.
1923년 11월 화폐개혁으로 등장한 렌텐마르크. 기존의 파피마르크와 1조 대 1로 교환됐던 이 화폐로 악명 높았던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마침내 끝을 맺었다.

전쟁에는 돈이 많이 들어간다. 하지만 자금원에는 한계가 있다. 세금을 더 올리기도 어렵고 국채를 파는 것도 한계가 있다. 결국 정부는 돈을 빌린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도 그랬다. 누구에게? 미국에게. 당시 미국은 전쟁과 한 걸음 떨어져 있었다.

전쟁 특수로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니 돈을 빌려 달라는 나라들에게 돈도 빌려줬다. 물론 독일은 해당이 되지 않았다. 미국은 영국과 한 몸이었으니까. 미국의 참전도 연합국이 질 경우 미국이 빌려준 돈이나 국채가 휴지조각이 될 게 우려됐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날 무렵 각 나라들의 부채 상황을 보자. 프랑스는 미국과 영국에 각각 40억 달러와 30억 달러씩 모두 70억 달러의 빚을 지고 있었다. 영국은 미국에 47억 달러를 빌렸지만 그렇게 큰 부담이 아니었다.

프랑스에 30억 달러를 빌려줌으로써 순 채무는 17억 달러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갚아야 할 돈은 연합국 나라들 중 최대 규모였다. 미국은 프랑스에 40억 달러 영국에 47억 달러, 그 밖의 다른 나라에 32억 달러를 빌려줌으로써 119억 달러 규모의 순 채권국이 됐다.

게다가 프랑스 상황은 영국이나 미국과 달랐다. 자기 앞마당에서 치러진 탓에 산업시설이 초토화됐다. 산업시설도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과 독일이 바로 산업생산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는 아니었다. 프랑스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독일로부터 하루빨리 배상금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프랑스의 가혹한 조치로 미국이 불만을 표출하자 프랑스는 미국에 부채탕감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빌려준 돈 떼이는 것은 개인이나 나라나 마찬가지다. 미국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1923년 루르 지역의 점거는, 파산으로 갈지 모른다는 프랑스의 절박한 상황의 반영이었다.

정부 부채는 그만큼 중요하다. 돈을 찍어 갚으면 된다고? MMT이론이 매우 위험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최근 2년 동안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한 바탕 전쟁을 치렀다. 펜데믹과의 전쟁이다. 전쟁에는 전비가 든다. 세계 많은 나라들이 전비 마련을 위해 돈을 찍어냈다. 그리고 그 배경에 MMT가 있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보라. 국가 채무는 국가와 국민 모두에 무지막지한 짐이 된다. 단지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만 볼 것은 아니다. 독일을 그렇게 만든 프랑스도 그 배경에 국가 채무가 있었다. 과도한 국가채무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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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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