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2 10:00 (일)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79)'최단명 장관' 급전직하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79)'최단명 장관' 급전직하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1.12.1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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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만에 낙마…'최장수 장관' 호언 장담 무색해져
역금리의 해소 등 '쓰루표 금융 정책'은 다 없던 일로
'고도성장의 비행연료' 현금차관은 눈덩이처럼 급증
1966년 '선거관리개각'서 빠지자 '세라비' 퇴임 소감
"서열 4위로 알았는데 더 센 사람들이 많았다"너스레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일본에서 튄 쓰루의 언행은 역금리 시정이니 현금차관 금지니 하며 자신의 코털을 건드려도 꾹 참고 있던 왕초에게 그를 경제팀에서 내칠 좋은 빌미가 되었다. 그의 기세에 눌려 있던 금융계도 불만을 쏟아냈다.

왕초와 쓰루가 장차관일 때부터 그들 간의 불화는 대통령도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불화가 경제팀장인 부총리와 재무부 장관 사이의 것이면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더구나 당시 한국경제는 겨우 성장세에 속도가 붙어 고도성장의 런웨이를 막 뜨려고 하는 매우 민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한일경협과 일본 투자자금은 한국경제의 비상(飛上)에 절실히 필요한 '비행 연료'였다. 그런 중차대한 국면에 경제개발정책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책임자가 나라 살림 꾸려가기를 두고 공개적으로 싸움질을 벌인다는 것은, 자칫 도약하려는 한국 경제를 주저앉히거나 추락시킬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1959년부터 1966년까지 7년 동안 도입된 외자는 총 3억 2500만 달러였다. 그러나 현급차관을 막아야 한다는 자쓰루가 재무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후 외자 도입은 고삐풀린 말 같았다. 67년 2억 3000만 달러, 68년 3억 3860만 달러, 69년 5억 5000만 달러……. 외자가 봇물 터진 듯 밀려들어 왔다./이코노텔링그래픽팀.
1959년부터 1966년까지 7년 동안 도입된 외자는 총 3억 2500만 달러였다. 그러나 현금차관을 막아야 한다는 쓰루가 재무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후 외자 도입은 고삐풀린 말 같았다. 67년 2억 3000만 달러, 68년 3억 3860만 달러, 69년 5억 5000만 달러……. 외자가 봇물 터진 듯 밀려들어 왔다./이코노텔링그래픽팀.

박통의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1966년 12월 26일에 단행된 '선거 관리 개각'에는 쓰루 이름이 빠져 있었다. (1967년에는 대선과 총선 두 선거를 치르게 되어 있었다.) 1959년 재무부 이재국 관리과장에서의 퇴출, 1962년 경제기획원 기획조정관 때의 보직해임에 이어 그의 세 번째 좌절이었다.

왕초는 '앓던 이'를 뽑았고, 경제팀은 다시 일사불란해졌다. 경제는 고도성장을 이어갔고, 역금리 해소와 현금차관 억제 등 쓰루의 '경제 정상화' 조치들은 몇 년 후를 기약해야 했다.

정확히 석 달(9월 26일~12월 25일) 동안 머물던 재무장관 자리를 떠나면서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는 '세라비(C'est la vie·그게 인생이다)'였다. 나중에 기자들이 "최장수 장관이 된다고 호언장담하더니 왜 최단명이 됐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내가 대통령, 총리, 부총리 밑에 랭킹 4위는 되는 줄 알았는데, 더 무서운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게 됐다"며 씩 웃었다.

하룻강아지 쓰루가 무서운 줄 알게 된 '더 무서운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정치자금을 모금하고 관리한 '정치자금 4인방'(청와대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 공화당 재경위원장, 그리고 부총리)이 아니었을까.

1959년부터 1966년까지 7년 동안 도입된 외자는 총 3억 2500만 달러였다. 그러나 쓰루가 재무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후 외자 도입은 고삐풀린 말 같았다. 67년 2억 3000만 달러, 68년 3억 3860만 달러, 69년 5억 5000만 달러……. 외자가 봇물 터진 듯 밀려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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