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금리의 해소 등 '쓰루표 금융 정책'은 다 없던 일로
'고도성장의 비행연료' 현금차관은 눈덩이처럼 급증
1966년 '선거관리개각'서 빠지자 '세라비' 퇴임 소감
"서열 4위로 알았는데 더 센 사람들이 많았다"너스레
일본에서 튄 쓰루의 언행은 역금리 시정이니 현금차관 금지니 하며 자신의 코털을 건드려도 꾹 참고 있던 왕초에게 그를 경제팀에서 내칠 좋은 빌미가 되었다. 그의 기세에 눌려 있던 금융계도 불만을 쏟아냈다.
왕초와 쓰루가 장차관일 때부터 그들 간의 불화는 대통령도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불화가 경제팀장인 부총리와 재무부 장관 사이의 것이면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더구나 당시 한국경제는 겨우 성장세에 속도가 붙어 고도성장의 런웨이를 막 뜨려고 하는 매우 민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한일경협과 일본 투자자금은 한국경제의 비상(飛上)에 절실히 필요한 '비행 연료'였다. 그런 중차대한 국면에 경제개발정책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책임자가 나라 살림 꾸려가기를 두고 공개적으로 싸움질을 벌인다는 것은, 자칫 도약하려는 한국 경제를 주저앉히거나 추락시킬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박통의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1966년 12월 26일에 단행된 '선거 관리 개각'에는 쓰루 이름이 빠져 있었다. (1967년에는 대선과 총선 두 선거를 치르게 되어 있었다.) 1959년 재무부 이재국 관리과장에서의 퇴출, 1962년 경제기획원 기획조정관 때의 보직해임에 이어 그의 세 번째 좌절이었다.
왕초는 '앓던 이'를 뽑았고, 경제팀은 다시 일사불란해졌다. 경제는 고도성장을 이어갔고, 역금리 해소와 현금차관 억제 등 쓰루의 '경제 정상화' 조치들은 몇 년 후를 기약해야 했다.
정확히 석 달(9월 26일~12월 25일) 동안 머물던 재무장관 자리를 떠나면서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는 '세라비(C'est la vie·그게 인생이다)'였다. 나중에 기자들이 "최장수 장관이 된다고 호언장담하더니 왜 최단명이 됐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내가 대통령, 총리, 부총리 밑에 랭킹 4위는 되는 줄 알았는데, 더 무서운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게 됐다"며 씩 웃었다.
하룻강아지 쓰루가 무서운 줄 알게 된 '더 무서운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정치자금을 모금하고 관리한 '정치자금 4인방'(청와대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 공화당 재경위원장, 그리고 부총리)이 아니었을까.
1959년부터 1966년까지 7년 동안 도입된 외자는 총 3억 2500만 달러였다. 그러나 쓰루가 재무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후 외자 도입은 고삐풀린 말 같았다. 67년 2억 3000만 달러, 68년 3억 3860만 달러, 69년 5억 5000만 달러……. 외자가 봇물 터진 듯 밀려들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