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1 21:10 (화)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위기史(12)더 본드⑨윌슨의 참전 연설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위기史(12)더 본드⑨윌슨의 참전 연설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1.06.29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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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로가 내세운 '고립주의' 벗어나 1차 세계대전에 파병결정
獨잠수함 공격 명분삼아…전쟁불참에 표를 준 국민들 의아

"우리 앞에는 몇 달 안에 끝나지 않을 불같은 시련과 희생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 이 위대한 평화로운 사람들을 전쟁, 그것도 모든 전쟁 중 가장 끔찍하고 비참한 전쟁으로 이끄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정의가 평화보다 더 소중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늘 가슴 깊이 간직해온 것들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정부에 발언권을 갖으려는 소시민의 권리를 위해, 작은 나라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정의가 지배하는 세계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나니,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1917년 4월 2일 미국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의회 연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후 "정의가 평화보다 소중하다(The right is more precious than peace)"는 연설문 속 문장이 그대로 이 연설문의 제목이 됐다. 돌려서 말한 것이었지만 뜻은 명확했다. "정의를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의회에 참전(參戰)을 요청했다 해서 이 연설문에는 '참전 요청 연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한 이 연설문에는 '전쟁교서(戰爭敎書)'라는 이름도 있는데, '왕이 전쟁을 선포한 문서'라는 의미다. 4일 후인 1917년 4월 6일 의회는 압도적 다수로 이 전쟁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전쟁이 일어난 지 약 3년 뒤 일이었다.

■ 고무줄 외교노선, 먼로주의

미국은 멀리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에 왜 뒤늦은 참전을 결정하게 됐던 것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노선, 즉 '고립주의'로도 불리는 '먼로주의'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먼로주의는 1823년 미국의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가 제창한 미국의 외교노선. 핵심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➀아메리카 대륙은 어떤 유럽 열강에 의해서도 식민지가 될 수 없다, ➁미국은 유럽 국가들의 기존 식민지나 종속국의 문제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➂미국은 유럽 국가들의 내부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 등이다.

물론 이 같은 외교노선이 한결같았던 것은 아니다. 10년 뒤 벌어진 일만 봐도 알 수 있다. 미국은 1833년과 1834년 영국이 프클랜드섬과 니카라과 일부를 식민지로 점령했을 때 이를 묵인했던 것이다.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19세기 말이면 '고립주의'란 외교노선 자체가 의심받는 지경이었다. 1895년 이른바 '미서전쟁'이라고 불리던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미국은 푸에르토리코나 괌, 필리핀 등을 식민화했다. '고립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행태였다. 20세기 들어 미국은 아예 먼로주의를 수정하기에 이른다. 1904년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후 '루즈벨트 코롤러리(Roosevelt Corollary)'라 이름 붙여진 새로운 외교노선을 발표한다. 여기에는 '국제경찰로서의 미국의 역할'과 '다른 나라에 대한 간섭 가능성'까지 열어뒀다.

1917년 2월 1일 독일이 ‘무제한 잠수전’ 대상에 미국 등 중립국도 포함시키자 윌슨 대통령은 이틀 후인 3일 의회 연설을 통해 독일과의 단교를 선언한다.
1917년 2월 1일 독일이 '무제한 잠수전' 대상에 미국 등 중립국도 포함시키자 윌슨 대통령은 이틀 후인 3일 의회 연설을 통해 독일과의 단교를 선언한다.

결국 '고립주의'라는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노선은 상황과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개념이었다. 한 마디로 일관성 없는 정책이었던 셈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과정에서도 이 같은 미국 외교노선의 성격은 그대로 드러난다. 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전통적인 '먼로주의 수호'를 공표했다. 유럽에서 터진 전쟁이니 미국과 관련이 없다는 얘기였다. 윌슨 대통령은 3년 내내 이 노선을 지켜나갔다.

이 같은 '노선의 수호'는 1916년 재선 가도에서도 그대로 유지됐다. 그는 다시 한 번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한 '불참의지'를 보여줬고 그로써 그는 다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취임 한 달 뒤에 터졌다. 그가 두 번째 임기에 취임한 날이 1917년 3월 4일이었다. 그러니 그가 의회에서 '참전 요청 연설'을 한 4월 2일은 취임 한 달에서 이틀이 부족한 날이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해서 표를 준 유권자들은 그야말로 가슴을 칠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더 기가 막힐 일이 있었다. 추후에 알려진 사실지만, 윌슨은 선거 전, 그것도 선거가 있기 10개월이나 전에, 이미 프랑스와의 비밀협약에서 미국의 참전을 약속했었던 것이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정치인들의 거짓말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법이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뒤늦게 전쟁에 참여했던 것일까? 세계경제사는 물론 세계 경제위기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연설문을 보자. 거기에 '답' 또는 그 단초가 있을 수 있다. 윌슨은 그날 연설에서 참전의 이유를 주로 독일의 잠수함에서 찾았다.

"독일정부가 2월 1일부터 영국과 아일랜드의 항구, 유럽 서해안, 독일의 적국이 관장하는 지중해 내의 항구 가운데 어느 곳에라도 접근하는 선박은 모두 잠수함으로 격침시키겠다고 했다"고 말한 그는 실제로 "독일 잠수함은 깃발, 지위, 화물, 목적지, 임무를 불문하고 무자비하게 격침시켰다"며 울분을 토했다. 독일의 이른바 '무제한 잠수함전'을 참전의 명분으로 얘기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2월 3일 독일과의 단교를 선언한 바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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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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