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일반 가구의 6배 넘는 집서 거주…적어도 무주택자나 쪽방관 딴판
맹자 연봉은 요즘 돈으로 따지면 몇 백억…임금 하사 36kg의 金 받아 챙겨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인사청문회가 열리니 장관 후보라는 이들을 둘러싼 온갖 구설이 터져 나온다. '논문 내조'니 '관사테크'니 하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는 판이다.
이를 보며 눈살을 찌푸릴 이들에게 위로가 될 만한 옛이야기가 있다. '청빈'을 으뜸 미덕으로 치던 조선의 선비들이 떠받들던 공자 맹자도 맑았는지(淸) 모르나 없이 살지는(貧) 않았다.
외려 청부(淸富)라면 모를까. 이건 중국의 칼럼니스트가 쓴 『공자는 가난하지 않았다』(리카이저우 지음, 에쎄)에 나오는 이야기다.
공자의 집은 33묘, 지금으로 치면 2만여 평방미터에 달했다. 집은 비록 방 3칸짜리 15평방미터에 불과했지만 담장은 몇 킬로미터에 달했다는 말이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에는 채소와 나무를 심고 가축을 기르는 땅까지 포함해 집의 담장을 둘렀다지만 당시 일반 가구는 대부분 5묘 정도의 크기였다니 공자는 적어도 무주택자거나 쪽방 신세는 아니었던 셈이다.
더 놀라운 것은 공자의 연봉이다. 노나라 출신인 공자는 한때 위나라에 가서 귀족 자제들에게 시서예의를 가르쳤는데 이때 1년에 좁쌀 6만 말, 90톤을 받았다. 이걸 현대 중국의 베이징 슈퍼마켓에서 사려면 약 50만 위안, 우리 돈으로 8,700만 원에 달한다. 당시 물가가 어땠는지 몰라도 요즘 월급쟁이 입장에서 보면 적지 않은 연봉이다.
공자가 31세 때 열국을 주유하기 시작했는데 허난 성 뤄양으로 갈 때, 개인적 방문이었음에도 국고의 지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제쳐 두고 맹자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맹자가 가장 잘 나갈 때는 제나라에서 경(卿)의 지위에 있을 때였는데 연봉이 좁쌀 10만 종, 역시 지금 단위로 환산하면 1만 5,000톤에 이르는 엄청난 고액이었다. 우리 돈으로 따지자면 몇 백억 원이 넘으니 상상하기 힘든 지경이다.
그 맹자가 제나라에서 2~3년 근무한 뒤 고향인 추나라로 돌아갈 때 송나라, 설나라 임금이 각각 황금 70일(鎰), 50일을 선사했다. 맹자는 이를 거절하지 않고 받았는데 당시 쓰이던 중량 단위 일(鎰)은 약 300그램이니, 맹자가 받은 금은 모두 3만 6,000그램이다. 36킬로그램의 금덩이! 순도가 문제가 되긴 하겠지만 보통 현대인은 평생에 한 번도 보기 힘든 '보물' 아닌가.
이랬으니 중국사에서 희대의 간신으로 꼽히는 명나라 가정제 때 탐관오리 엄숭은 장시성에만 6,600채가 넘는 부동산을 보유했고, 그중엔 손자 엄홍, 엄소경 명의의 별장도 있었다는 구절을 읽어도 그리 놀랍지 않다. 한 줌의 권력이 있으면 한 주먹의 특혜를, 한 뼘의 지위가 있으면 한아름의 눈먼 돈을 챙기는 게 권력의 생리라 여겨져서다. 그나마 엄숭의 말로가 비참했다는 게 작은 위안이랄까.
---------------------------------------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