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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위기史(12)더 본드 ⑦빌헬름 2세의 야욕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위기史(12)더 본드 ⑦빌헬름 2세의 야욕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1.04.26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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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러시아에 선전포고…바그다드를 중동진출 교두보 추진
해군력 열세 간과…'프랑스 고립' 외교정책 근간 무시해 프랑스와 러시아 동맹 자초
20세기 들어 중국까지 넘보고 영국과 마찰…英, 동아시아 이권 지키려 일본에 추파

"오늘 우리는 모두 독일의 형제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일의 형제입니다. 지금 우리의 이웃이 우리에게 다른 길을 주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 이웃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바랍니다. 선한 우리 독일의 검이 이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1914년 8월 1일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는 왕궁 발코니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워낙 연설을 좋아하는 그였다. '연설왕'이라는 별명까지 있을 정도였다. 연설 능력이 빼어나 즉흥 연설로도 듣는 청중을 매료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이날 연설만큼은 떨렸을 것이다. 1859년생으로 1888년 겨우 스물아홉에 황제에 등극했고 무려 26년이나 황제로 군림했지만 이처럼 대규모 전쟁을 치를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날 독일에 총동원령을 내리며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다음날에는 벨기에를 침공했고 벨기에 침공 다음날은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사라예보 사건이 터진 게 1914년 6월 28일 일이었다. 독일은 사건 한 달 만에 이처럼 큰일을 벌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렇게 급속하게 '세계화'됐다.

하지만 인간은 어리석은 동물이다. 4년 뒤 일을 미리 알았다면 빌헬름 2세는 결코 이 같은 결단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에 대한 총동원령은 물론 러시아나 프랑스에 대한 선전포고도 없었을 것이다. 1918년 여름 무렵 독일은 프랑스 등 연합국 측에 대해 패색이 짙었고 급기야 군부에서 항복을 검토하며 빌헬름 2세의 퇴위를 거론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1914년 8월 1일 왕궁 발코니에서 연설 중인 빌헬름 2세와 군중들.
1914년 8월 1일 왕궁 발코니에서 연설 중인 빌헬름 2세와 군중들.

당연히 빌헬름 2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해 가을 군대와 시민의 반정부 시위가 터져 나오자 그도 견디지 못했다. 결국 그해 11월 내각은 빌헬름 2세의 퇴위를 일방적으로 선언했고 빌헬름 2세는 쫓겨나듯 고통스럽게 네덜란드로 망명한다. 이로써 그는 '독일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 비운을 겪는다.

■ 독일 육군, 세계 최강 수준 도달

그는 자국의 군사력을 너무 믿었다. 물론 그럴 만한 측면이 있다. 특히 그에게는 1880년 42만5000명에서 1910년 69만4000명으로 30년 만에 63%나 늘어난 세계 최강 수준의 육군 병력이 바위처럼 든든했을 것이다.

1910년 기준으로 76만9000명의 전력을 자랑하는 프랑스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57만1000명의 병력을 보유한 세계 최강 영국이나, 신흥 강국으로 위용을 자랑하던 미국의 보유 병력 12만7000명보다는 훨씬 많았다. 하지만 지나치게 '과신(過信)했다'는 것 또한 문제였다. 해군력을 봤을 때 특히 이런 비판이 나올 수 있다.

독일 보유 해군 전함은 96만4000톤으로 미국(82만4000톤)이나 프랑스(72만5000톤)에 비해서는 20% 전후 우세했으나 영국(217만4000톤)에 비해서는 절반에 불과했다. 해군력의 열세는 독일 패배의 주요 원인이었다. 하지만 빌헬름 2세에게는 더 큰 과오가 있었다. 외교 분야에서의 실패였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첫째는 식민지 쟁탈전에 뒤늦게 참여했으면서도 너무 큰 야욕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이다. 앞서 설명했듯 독일은 19세기 후반 비로소 통일을 달성한 '늦은 제국'이었다. 통일 과정에서는 식민지 쟁탈전에 참여할 여력이 없었고, 통일 후에는 안정을 꾀하고 다른 열강과의 충돌을 피하느라 이 쟁탈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빌헬름 2세는 달랐다. 그는 적극적인 식민지 개척 정책을 펼쳤다. 중동은 그에게 특히 중요했다. 독일의 베를린과 터키의 비잔티움(이스탄불),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잇는다는 이른바 독일의 '3B정책'이 그의 꿈을 말해준다. 1897년에는 터키를 방문해 "낙후된 인프라사업의 현대화를 돕겠다"며 자신의 속내를 세상에 알렸다.

독일의 베를린과 터키의 비잔티움(이스탄불),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잇는다는 독일의 ‘3B정책’과 이집트의 카이로와 남아공의 케이프타운, 인도의 캘커타(콜카타)를 잇는다는 영국의 ‘3C정책’. ▶자료: 두산백과
독일의 베를린과 터키의 비잔티움(이스탄불),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잇는다는 독일의 '3B정책'과 이집트의 카이로와 남아공의 케이프타운, 인도의 캘커타(콜카타)를 잇는다는 영국의 '3C정책'. 자료=두산백과.

다른 열강들은 이를 싫어했다. 당연했다. 우선 러시아를 보자. 당시 러시아는 터키 서부, 마르마라해(海)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해협은 전통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러시아는 독일의 '3B정책'이 이 해협의 지배권을 위협하는 정책으로 받아들였다.

영국은 독일의 노골적인 식민지 확장 정책에 대해 러시아보다 더 반발이 컸다. 아프리카와 인도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은 이집트의 카이로와 남아공의 케이프타운, 인도의 캘커타(콜카타)를 잇는다는 이른바 '3C정책'을 추진 중이었다.

독일의 '3B정책'과 당연히 충돌했다. 거기에 독일은 20세기 들어 중국에까지 손을 뻗쳤다. 이래저래 영국과의 마찰을 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빌헬름 2세의 외교적 실책 중 결정적이었던 것은 프랑스의 고립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그의 외교를 보는 두 번째 측면이다. 지난 번 글에서도 설명했듯 독일제국은 통일 과정에서 프랑스에 가혹했다. 당연히 프랑스는 복수의 칼을 갈았고 독일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프랑스의 고립을 외교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다.

특히 러시아와 프랑스의 연대를 우려한 비스마르크는 돈이 궁했던 러시아에 꾸준히 차관을 제공, 독일을 떠나지 못하게 잡아뒀다. 하지만 빌헬름 2세의 등장과 함께 이 정책은 끝을 맺는다. 빌헬름 2세는 러시아에 대한 차관을 끊었고 이 틈을 프랑스가 비집고 들어와 마침내 프랑스와 러시아가 손을 잡는 일이 생겼다.

■ 佛의 고립탈피, 빌헬름 2세의 최대 패착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러시아와 가장 껄끄러웠던 구미 열강은 영국이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영국이 중시하던 중국 등 동아시아와 밀접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던 탓이다. 그런데 빌헬름 2세의 등장과 함께 이 러시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비록 당대 최강이었다고는 하나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의 군사력은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다.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자국의 이익을 지키려면 영국은 하루 빨리 새로운 파트너를 물색해야 했다. 바로 이 무렵 눈에 들어 온 나라가 있었다. 일본이었다. 일본은 당시 청의 몰락과 함께 동아시아의 새로운 맹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야망을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파트너는 일본이 제격이라 판단했다.

20세기 들어 영국은 본격적으로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돌입한다. 1902년 중국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경계해 체결한 '1차 영일(英日)동맹'은 그 같은 배경 아래 이뤄졌던 것이다. 이 동맹은 영국이 '영예로운 고립'으로부터 탈피한 최초의 조약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의미는 딴 곳에 있었다. 이 조약이 체결된 이후 수 년 사이 '삼국동맹' 및 '러시아와 프랑스 간 군사협정'이 대치하고 있던 국제관계에 또 다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영국은 중국에서의 우월한 지위가 인정됐고 동시에 양국은 공동의 적인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해 유력한 지원 세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일본은 이 조약을 계기로 러시아와의 일전(一戰)에 대비했고 나아가 이 조약에 기초한 영국의 자원에 힘입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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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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