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09:30 (토)
[김성희의 역사갈피] 시보떡 보다 무서웠던 허참례
[김성희의 역사갈피] 시보떡 보다 무서웠던 허참례
  •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 jaejae99@hanmail.net
  • 승인 2021.03.02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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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공무원 발령 기념 떡을 돌리기나 '과장과 식사 하는 날' 공무원 사회 유습
조선시대의 신임 관리는 신고식인 허참례와 선임자와 동석하는 면신례 거쳐
열흘간 시제를 풀고 체벌도 당해 녹초…쉽게 통과하려 선배에게 뇌물 주기도
사진=SBS 드라마 '사임당, 더 허스토리',떡 박물관/이코노텔링그래픽팀.
사진=SBS 드라마 '사임당, 더 허스토리',떡 박물관/이코노텔링그래픽팀.

얼마 전 공무원 사회의 '시보떡' 폐단에 관한 뉴스가 눈길을 끌었다. 시보(試補), 즉 인턴을 마치고 정식 공무원이 되는 이들이 이를 기념해 주위에 떡 등을 돌리며 인사치레를 하는 관행이 있다고 했다.

한데 이것이 변질되어 형편이 안 되는 이는 단순한 백설기를 돌렸다가 예의가 없니 뭐니 해서 구설에 오르는 등 당사자들에겐 만만치 않은 부담이 된다는 소식이었다.

그러자 '시보떡'보다 일주일 한 번 정도 국과장을 모시고 식사를 대접하는 '과장 모시는 날'이 더 괴롭다는 하소연이 뒤를 이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이런 무리한 텃세 부리기랄까 '신고식'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행해진다. 그리고 이런 폐해가 이야기될 때면 흔히 군사문화의 잔재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의 유습이란 지적도 나온다.

한데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런 '신고식'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모양이다. 『역사책에 없는 조선사』(이상호 외 지음, 푸른역사)란 책이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일기에서 발췌한 이야기로 '일상사'를 파고든 책인데 여기 16세기 초 예안 출신 김령이란 이가 기록한 관료 신고식 이야기가 나온다. 허참례(許參禮), 면신례(免新禮) 관행이 그것이다.

허참례는 신입 관리가 선배 관원들에게 자신도 관원의 반열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인사'이고, 면신례는 선임자들과 동석할 수 있는 자리에 드는 의례였다. 면신례는 '시보떡'처럼 술과 안주를 준비해 성의를 표하는 형식이었지만 허참례는 꽤나 가혹한 신입 괴롭히기였단다.

김령의 일기에 따르면 이른 새벽 승문원에 들어가 주어진 제목으로 글을 짓는 것으로 시작해 바닥에서 몸을 뒤집어 구르기, 몸을 구부려 대청 아래를 기어나오기, 기와 위에 책상다리하고 앉기 등 요즘 눈으로 봐도 만만찮은 '얼차려'를 받아야 했다.

이런 허참례는 면신례를 하기까지 열흘 남짓 동안 종일 행해졌는데 심한 경우 가혹 행위와 구타까지 가해져 사망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니 그 혹독함은 '시보떡'을 능가했던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허참례를 쉽게 받으려 선배들에게 뇌물을 바치곤 했을까. 김령은 요즘으로 치면 고시인 대과에 합격한 엘리트였다. 그리고 대과 합격자 대부분은 명문대가의 자제로 평생 유학을 공부하느라 몸 쓰는 일이라곤 도통 해보지 않은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오로지 순탄한 관료생활을 위해 이런 신고식을 감수해야 했다.

이런 '신고식'을 두고 신임 관원이 된 수재들의 오만함을 누르고, 상하를 엄격하게 구분해 업무 효율성을 기하기 위한 관행이라는 명분이 있었다지만 이렇게 '출세'한 이들이 후임과 백성을 위한 유능하고 자애로운 관료가 될 수 있었을까. 오히려 한풀이를 위해 후배들에게 허참례와 면신례를 대물림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을까.

조선시대에도 이런 폐해를 없애려는 왕명이 수차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없어지지 않았다니 역시 제도보다 그걸 운용하는 사람이 문제인 점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사건과 영웅호걸 중심의 정사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역사의 뒤안길을 걷다 얻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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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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