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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쓰는 세계경제위기史(12) 더 본드 ①찰리 채플린과 1차 세계대전
영화로쓰는 세계경제위기史(12) 더 본드 ①찰리 채플린과 1차 세계대전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1.03.02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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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참전 선언으로 군비(軍費) 마련 대규모의 전시공채 (戰時公債) 판매 나서
1918년 4월8일 재무성 건물앞서 유명 배우들과 함께 군중대상 채권판매 '연설'

'제1차 세계대전'을 상상해 보자. 뭐가 떠오를까. 대부분 전투 장면일 것이다. 그것도 지긋지긋한 참호전.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감독의 2011년 작 <워 호스(War Horse)>에서 보듯 제1차 세계대전은 기관총의 전쟁이었다.

총탄을 피하면서도 자유롭게 이동하자니 길게 도랑을 팔 수 밖에 없었다. 전진도 퇴각도 쉽지 않은 전투 방식이다.

1957년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이 발표한 반전(反戰) 영화의 백미 <영광의 길(Paths Of Glory)>이나 지난해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후보로 올랐다가 봉준호에게 아깝게 패한 샘 멘데스(Sam Mendes)의 <1917> 역시 참호전이 중심을 이룬다.

스페인독감을 떠올리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 코로나 상황 아닌가. 전쟁보다 더 무서웠다던 전염병이다. 하지만 영화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스페인 독감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가 없는 것이다. 2016년 오스트리아 감독 디터 베르너(Dieter Berner)가 오스트리아의 요절한 표현주의 천재 작가 에곤 쉴레(Egon Schiele)를 다룬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에서 잠간 나오는 정도다. 실제로 그와 그의 아내는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여덟이었다.

■ 전쟁ㆍ연준(聯準)ㆍ스타의 관계는?

제1차 세계대전과 연준(연방준비제도, FRS)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쟁과 스페인독감과의 연계보다 더 연상하기 어렵다. 연준과 전쟁과의 관계를 그린 영화나 문학작품, 그림 등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영화에서 경제나 금융을 직접 다룬 장르가 생긴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어렵고 골치 아픈, 그리고 표현하기 어려운 돈 문제를, 전쟁과 엮어 다룬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일반 사람이 금융이나 경제사 관련 논문을 읽을 일도 없으니 대중이 이 둘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다.

하지만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연준, 그리고 누구라도 알고 그리워하는, 친근하고 위대한 배우 겸 감독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과의 관계다. 제1차 세계대전, 연준, 그리고 채플린에 대한 전문가가 있다 치자. 그럼에도 이 셋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필자에게도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위기사'를 연구하다 보니 이 셋의 관계를 연구할 기회가 주워졌던 것일 뿐이다. 이 글을 쓰기 전에는, 당연히, 이 셋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

지금부터 필자는 이 글의 독자를 이 셋이 엮여 있는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고자 한다.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세계다. 우선 옛날 신문에 실린 사진 한 장을 보자. 성조기가 펄럭이는 고층건물에 둘러싸인 도로에 수만은 됨직한 군중이 빈틈없이 깨알처럼 모여 있다. 단상 위에 있는 두 남성을 보라. 남성 한 명이 다른 남성 한 명을 번쩍 들어올렸다. 모자를 들고 군중에 환호하는 남성이 이 날 집회의 주인공임은 어림짐작할 수 있다. 그래, 바로 그가 찰리 채플린이다.

1918년 4월 8일자 신문 ‘뉴욕트리뷴(the New York Tribune)’ 8면.
1918년 4월 8일자 신문 '뉴욕트리뷴(the New York Tribune)' 8면.

이 장면은 1918년 4월 8일 월스트리트의 미국 재무성 건물 앞에서의 일이다. 사진은 다음날 '뉴욕트리뷴(the New York Tribune)' 8면에 게재된 것이다. 기사의 헤드라인은 '영화계 스타들이 말하는 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2만 군중'으로 돼 있다.

이 헤드라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➀영화계 스타들이 ➁'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얘기했다는 것, 그리고 ➂그것을 듣기 위해 2만 군중이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➃시점이 4월이었으니 이 집회가 제1차 세계대전의 말미에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전쟁은 집회 7개월 후인 11월에 끝났다.

집회에 참석했던 영화계 '스타들'은 세 명이었다. 채플린과 채플린의 단짝 더글러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banks), 그리고 여배우 메리 픽포드(Mary Pickford)였다. 이들 세 명은 말 그대로 '당대 최고'였다.

918년 4월 8일자 신문 ‘뉴욕트리뷴(the New York Tribune)’ 8면에 나온 실제 사진.
918년 4월 8일자 신문 '뉴욕트리뷴(the New York Tribune)' 8면에 나온 실제 사진.

채플린은 1914~15년 두 해 동안 60편 가까운 영화를 찍으며 '최고 스타'의 반열에 올라섰고, 1910년대 중반부터 코미디언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페어뱅크스는 1917년 자신의 영화사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영화사>를 설립해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제작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픽포드는 집회 한 해 전인 1917년 개봉된 <불쌍한 부잣집 소녀>와 <서니브룩 농장의 레베카>로 '미국의 연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등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 채플린은 공채 외판원?

이들 '스타들'은 이날 왜 할리우드가 아닌 월스트리트에 모였던 것일까? 또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그들이 말하려는 '전쟁에서 이기는 법'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엄청난 군중은 왜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것일까?

바로 이 대목에서 잘 보이지 않던 제1차 세계대전과 연준, 그리고 채플린의 뒤얽힌 세계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 전쟁과 돈, 그리고 스타로 굳건히 한 자리를 차지한, 그러나 위태로운 한 영화계 스타의 생존전략이 뒤얽힌 세계다.

이날 이들 '영화계 스타 배우들'의 역할은 세일즈맨이었다. 감독이 팔라고 준 물건은 '리버티 본드(Liberty Bond)'. 제1차 세계대전의 군비(軍費) 마련을 위해 정부가 발행한, 이른바, 전시공채(戰時公債)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에서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피살되면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3년 가까운 기간 동안 '중립'을 외치던 미국은 1917년 4월 2일 '참전(參戰)'을 결정한다. 독일이 영국의 해상을 봉쇄하겠다며 선언한 '무제한 잠수함전'의 대상에는 미국도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또한 러시아에서 터진 혁명으로 영국ㆍ프랑스 및 러시아의 양공 작전이 어려워졌던 것도 참전의 주요 이유 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선언하며 자금조달을 위해 발행한 전시공채 ‘리버티본드(Libert Bond)’.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선언하며 자금조달을 위해 발행한 전시공채 '리버티본드(Libert Bond)'.

전쟁에서는 당연히 무기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군인들 월급도 줘야 하고 밥도 먹여야 한다. 차나 비행기, 배가 움직이려면 기름도 필요하다.

이 모든 게 '돈'이다. 그래서 '전쟁은 돈 싸움'이라는 말까지 있다. 전쟁이 터지면 정부는 돈을 모아야 한다. 전쟁을 치러야 하는 정부는 어떻게 돈을 모을 수 있는 것일까? 크게 세 가지다. ➀세금을 더 걷거나 ➁공채를 발행해 국내외 국민과 기업 또는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거나 아니면 ➂돈을 찍어내는 것이다.

잉글랜드은행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적인 방식이라면 양적완화, 즉 정부가 채권을 발행하고 잉글랜드은행이 그 채권을 사주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 방식의 관계자 모두에게 '윈(Win)'이다.

의회는 정부가 함부로 돈을 찍어내는 것을 방지할 수 있고 정부로서는 자금 동원이 쉽다. 은행 입장에서는 이자를 받아 수익을 낼 수 있어 좋다. 보통의 중앙은행이라면 세 번째 사안은 해당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잉글랜드은행은 달랐다. 지난 번 글에서 많이 얘기했듯, 잉글랜드 은행은 주주가 있는 주식회사 형식으로 운영됐기 때문이다.

실은, 연준도 마찬가지 방식이었다. FRS의 핵심기관 연준은행의 주주도 민간인 또는 민간은행이었고 이들의 상위기관인 연준위원회의 의사결정에도 지분(持分)이 중요했다.

하지만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선언한 때 상황은 조금 달랐다. 무엇보다 전비(戰費) 규모가 엄청났다. 이 경비를, 양적 완화 방식으로 돈을 찍어 동원한다면 나라 경제 전체에 악영향을 줄 게 뻔했다. 전쟁과 인플레이션의 관계는 이미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바 있다. 미국 역시 남북전쟁을 겪으며 이를 절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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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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