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 '페이퍼리스'(paperless) 운운했지만 쓰임새 더 늘어
1960년대 후반 美國선 종이로 만든 드레스 50만 벌 우편판매 기록
종이 문화史 다룬 英작가의『페이퍼 엘레지』엔 종이옷 퇴출 자취도
골판지가 때 아닌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단다. 코로나 사태로 가정에서 택배로 음식 배달이며 쇼핑을 하는 일이 늘다보니 택배업체들의 수요가 급증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코로나 불똥이 엉뚱한 데로 튄 셈인데 그러다보니 종이에 생각이 미쳤다.
종이는, 인류사의 위대한 100대 발명에는 빠질지 몰라도 '1000대'를 꼽자면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문명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쇄술(종종 3대 발명으로도 꼽힌다)은 종이가 없다면 생각할 수 없으니 말이다. 사실 종이가 없는 생활은 상상하기 힘들다.
디지털 혁명으로 '페이퍼리스paperless' 운운하지만 책, 화장지, 포장재 등 종이의 쓰임새는 오히려 늘어나는 인상이다. 그중 지금은 잊힌 감이 있지만 종이옷이 있다. 단순히 옷본이나 어깨, 깃에 심으로 쓰이는 옷 만드는 데에 쓰인 게 아니라 천 대신 종이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이야기다. 1914년 영국의 한 언론은 "중국과 일본의 인구 75% 이상이 종이옷을 입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후진국만 그런 게 아니라 그 기사에 따르면 독일의 가난한 계층, 멕시코의 대다수 인구도 종이옷을 입었다.
그런데 사실 종이옷이 붐을 이뤘던 것은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였다. 미국의 스캇 제지회사에서 1966년 슈미즈 스타일 드레스를 선보였는데, 우편주문으로 50만 벌이나 팔았다. 가볍고, 싸고, 다양한 변형이 가능하고 휴대가 쉽다는 점을 이용해 종이옷은 대유행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카드사로 유명한 홀마크사가 이어서 '접대용 드레스'를 출시했으니 어느새 속옷에서 겉옷까지 진출한 것이었다. 이윽고 종이옷은 양복은 물론 비옷과 비키니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시장의 환영을 받았다. 물론 전부 종이 재질은 아니고 나일론, 레이온 등을 섞어 만든 것도 있긴 했다.
하여튼 종이옷 열풍이 얼마나 드셌는지 1967년 타임지는 미국 주요 제지업체인 스털링페이퍼에서는 '종이 리조트웨어'를 개발 중이라고 보도했다. 짐은 집에 두고 휴가를 가서는 호텔에서 간단하게 사 입을 일회용 옷을 만들자는 계획이었다. 화려한 색상과 모양 등 가공이 쉬운 반면 가격이 상대적으로 싸기에 가능한 기획이었다.
하지만 종이옷 열풍은 몇 년 못 가 시들해졌다. 천으로 된 옷에 비해 인화성이 높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그때 사람들은 담배를 워낙 많이 피웠기 때문에 종이옷은 자칫 불이 붙기 쉬워 몇몇 큰 사고가 났던 탓이다.
이 이야기는 영국의 작가가 종이 문화사를 다룬 『페이퍼 엘레지』(이언 샌섬 지음, 반비)에 나온다. 종이옷은, 시장을 선도하는 상품이라도 시대에 맞지 않으면 퇴출된다는 교훈을 준다. 그런 것이 비단 종이옷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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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