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1 02:20 (목)
[김성희의 역사갈피] 女權 돌파구 연 '피임약'
[김성희의 역사갈피] 女權 돌파구 연 '피임약'
  •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 jaejae99@hanmail.net
  • 승인 2020.12.28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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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인류 최초의 경구피임약 '에노비드' 나오면서 여성의 족쇄 풀려
당시 피임약은 불법이어서 '월경 조절용', '피임은 부작용'이라고 둘러대
『 텐 드럭스 』이라는 책은 인류에 영향 준 10여개 약물 개발역사를 모아
ⓒ이코노텔링그래픽팀
ⓒ이코노텔링그래픽팀

화학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조금 과장하자면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 혹은 능력 중 하나라 할 정도다.

이 화학의 산물 중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하는 것이 약이다. 약국의 선반을 채우고 있는 온갖 약은 모두 화학제품이다.

그런 만큼 약은 과학사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을 만도 한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독일의 기술사 한스 요아힘 브라운이 쓴 『세계를 바꾼 가장 위대한 101가지 발명품』(플래닛미디어)에는 주먹도끼부터 인터넷까지 등장하는데 이 중 '약'은 오직 하나, 수많은 약 중 유일하게 '알약(the Pill)'으로 불리는 피임약뿐이다.

피임약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는 『텐 드럭스』(토머스 헤이거 지음, 동아시아)에 나온다. 인류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진 10여개의 약물 개발사를 다룬 이 책에 의하면 최초의 경구피임약 '에노비드'는 1957년 미국에서 선보였다.

사실 수태를 조절하는 피임약은 임신과 출산의 신비가 알려지기 전부터 오랜 숙원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임신과 출산으로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목숨을 잃거나 상처를 입었고, 임신은 여성에게는 독립성의 종말, 육아와 가사에 매이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혼외임신은 어디서나 죄악으로 여겨졌다.

책에 실린, 피임약 개발을 둘러싼 상세한 이야기를 모두 언급할 수는 없다. 단지 유명한 여성운동가 마거릿 생어와 의식 있는 여성 부호 캐서린 매코믹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처음 개발된 피임약의 임상실험을 미국이 아닌 푸에르토리코의 저소득층 여성 수백 명에게 실시했다는 사실은 기억해 둘 만하다. 아, 또 있다. 당시 미국에선 피임약 제공이 불법이었기에 '에노비드'는 월경 조절용으로 소개되었고 임신 방지는 '부득이한 부작용'이라 해서 법망을 피해 갔다고 한다.

경구피임약 시판의 파급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섹스와 임신, 섹스와 결혼의 고리가 끊어지면서 60년대 섹스혁명이 일어났다. 이것만이 아니다. 여권신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여성에게 자유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면서 초혼 연령이 낮아졌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급증했다. 1970년에서 2000년 사이에 여성 변호사와 판사의 비율이 6배로 늘었고, 여성 의사의 비율은 같은 기간에 3배 가까이로 증가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몇 년 이내에 결혼하는 패턴이 바뀐 결과였다.

피임약이 여성의 운명을 바꾸었고, 그에 따라 세상이 변했고, 인류의 역사 흐름이 변했으니 가히 '위대한 알약'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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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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