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수록 부하직원 담금질의 강도는 더욱 심해져 '결재서류 공중부양' 잦아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군부의 압력하에서도 의지와 소신으로 경제 논리를 지켜낼 인물은 쓰루밖에 없다는 게 그 인사의 핵심적 판단 요소였다.
이한빈 차관의 간곡한 부탁에 수술 후 몸이 성치 않은 상태에서 쓰루는 군말 없이 신생 부처(기획원)에 '시집가기'로 했다.
그는 이 차관이 시키는 것이라면, 앞뒤 따지지 않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갈 사람이었다. 이 차관은 재무부 관료 중에 그를 알아보는 유일한 상급자였다. 그를 믿고 이끌어주고 밀어준 은인이었다. 출세나 누리는 권한으로만 보면 사세국장으로 남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훗날 벌어진 일들을 생각해보면, 그가 신생 부처에 예산국장으로 간 것은 개인적으로 보나, 기획원으로 보나, 특히 나라경제로 보나 '신의 한 수'였다. 첫 은인 이한빈의 곁을 떠나 시집간 시댁에서 그는 또 한 사람의 은인을 만난다. 경제기획원 초대 원장을 맡은 '시아버지' 김유택 씨였다.
예산국장으로 기획원 출범에 참여한 쓰루는 신생 부처에 같이 시집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부하 동료들에게 첫날부터 뛰기를 요구했다. 기획원이 하루빨리 경제부처의 으뜸으로 나서야 하는 만큼, 거기에 인솔해 데려간 '친정 식구' 예산국이 기획원의 으뜸 부서로 자리매김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예산국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처음부터 밉보일 일투성이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작성에 열을 올리던 최고회의로서는 걸핏하면 '그렇게 많은 국가사업을 벌일 돈이 없다'는 둥, '원조가 줄어들고 있어 계획에서 상정하고 있는 성장률은 너무 높다'는 둥, 계속 딴죽을 거는 예산국을 곱게 볼 수 없었다. 쿠데타 직후 서슬이 퍼런 당시에 최고회의와 어긋난다는 것은 꼬여도 한참 꼬인, '간이 배 밖에 나온' 일이었다.
최고회의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음에 따라, 안 그래도 직원들에게 '최고의 지식과 최강의 임무 수행 능력'을 부추겨왔던 그의 다그침은 더욱 심해졌다. 그의 부하 담금질의 일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과장 때부터 악명 높았던 철저한 '부하 직원 길들이기'는 예산국장 시절부터는 아예 '쓰루표'로 자리 잡게 되었다. 기안 내용을 보고하러 들어온 부하 직원이 속사포처럼 쏟아붓는 질문에 행여나 답변을 머뭇거리기나 하면 "그런 머리로 어떻게 국가 예산을 다루느냐?"면서 불벼락을 내렸다.
당시에 기안 서류가 여러 장일 때는 얇은 종이를 가늘게 꼬아 만든 끈으로 서류를 묶어서 사용했다. 한번은 그가 화가 나서 기안 서류를 공중으로 집어 던졌다. 종이끈이 풀리면서 서류가 공중분해돼 산산이 흩날렸다. 기안자는 얼굴이 벌겋게 되어 사무실 바닥을 기다시피 하여 흩어진 서류를 주워 모아야 했다. (내용 미달인 서류 뭉치를 흩뿌리는 버릇은 부총리가 되어서까지 이어졌다.)
혼쭐난 그 직원은 며칠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여 철저하게 서류를 준비하고 쓰루의 심기를 살핀 후 다시 결재를 받으러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목도 보지 않고 결재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김주남 과장이 쓰루에게 "서류를 집어 던질 때는 언제고, 보지도 않고 결재하는 건 또 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쓰루 왈 "(욱하는 마음에) 서류를 내던지기는 했지만 그게 미안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 기안자가 충분히 보완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두 번째는 보지도 않고 결재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