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리던 사무관' 김주남ㆍ 최각규ㆍ 최동규ㆍ 김용환ㆍ장재식 모두 장관 지내
당시 재무부 예산국은 고등고시에 합격한 인재들의 등용문이었다. 이 국장과 그 휘하의 쓰루와 그의 고시 동기인 이철승 과장은 해마다 행정고시 합격자 중 1등부터 5등까지를 모조리 예산국에 데려왔다. 예산국은 고시 합격자 사이에서도 인기 1순위였다. 그들을 영입해 예산국뿐 아니라 이재국, 사세국 등에서도 수습을 받도록 했다. 탐나는 인재를 끌어모으는 쓰루의 '사람 욕심'은 이때 벌써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각 국(局)을 끌고 가던 김주남(훗날 건설부 장관), 최각규(훗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최동규(훗날 동력자원부 장관), 김용환(훗날 재무부 장관), 나오연(훗날 3선 의원·국회재정경제위원장), 장재식(훗날 산업자원부 장관,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의 부친) 등이 '날리던 사무관'들이었다.
엘리트 과장으로 이름을 날리는 것에 비례해 쓰루의 콧대도 높아져갔다. 바로 이때 쓰루는 한 악연을 만난다. 부흥부의 장예준 과장이었다. 부흥부는 원조 관리, 전후 경제부흥, 경제기획 등 훗날 부처로 치면 경제기획원과 건설부를 합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원조로 연명하는 전시경제에서 일종의 슈퍼 부처였던 것이다. 당시는 관도, 민도, 경제개발도, 심지어 국방도 미국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시절, 예산4과장의 업무 중 하나가 부흥부에 가서 대충자금을 배정받아 오는 것이었다. 그 상대가 바로 장 과장이었다. 쓰루는 장 과장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충자금은 직접 재무부로 들어오지 않고 부흥부를 통하여 재무부에 전해지는 절차를 밟았다. 그러다 보니 부흥부 관료들은 마치 자기네가 한국 정부를 먹여 살리는 듯이 거드름을 피우는 경우가 잦았다.
장 과장은 쓰루가 오후에 찾아가면 자주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고 한다. 점심에 걸친 반주 탓이었는데, 사람이 좋아 남과 잘 어울리다 보니 생긴 버릇이었다. 당시는 관료들이 점심시간에 찾아온 사람들과 반주를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렇지만 깐깐한 쓰루 과장은 점심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는 공직자의 낮술에 관해 일종의 결벽증이 있었다. 밤술은 정치인이나 언론인 등과 함께했지만, 훗날 '정치를 해야 하는' 부총리가 되었을 때도 박통(박정희 대통령) 말고는 낮술을 하지 않았다.
장 과장이 낮잠 깰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를 않나, 부스스 잠을 깬 장 과장이 '무슨 일로 왔냐'는 식으로 아랫사람 대하듯 하지를 않나, 쓰루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장 과장 쪽에서도 할 말은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에게 굽실거리거나 점심 대접을 하지도 않고, 돈 타러 온 사람이 고분고분하기는커녕 뻣뻣한 태도로 일관하며, 공무 볼일만 보고 훌쩍 사라져버리는 '제 분수를 모르는' 쓰루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일에 임하는 자세부터 두 사람은 아귀가 맞을 수 없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1969년에 쓰루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부임해보니 기획원 차관이 장예준이었다. "고래로 '인생하처불상봉(人生何處不相逢)'이라 하지않았던가!" 2년 반 뒤 췌장암으로 부총리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쓰루는 장 씨를 차관 자리에 앉혀두었다. 그 긴 기간 동안 애들 말로 뒤끝이 작렬하는 쓰루가 장 차관을 어떻게 대했을지는 안 봐도 눈에 선하다.)
부흥부에서 대충자금을 타 왔던 쓰루가 그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 것은 한국이 하루라도 빨리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절감은 훗날 부총리 쓰루의 경제개발계획과 외자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