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들고 시험장에 들어가거나 답안지 대신 써주는 등 부정으로 얼룩
『조선의 뒷골목 풍경』이란 책은 과거시험의 그 난맥상 소상히 그려

얼마 전 대입 수능시험이 끝났다. 올해는 워낙 사회적 이슈가 많았던 탓인지 무난하게 끝난 듯하다.
그래도 전국의 수험생들과 그 부모들이 마음을 졸이고, 각종 매체에서 시험장 안팎의 풍경을 전하는 걸 보면, 예년 같진 않아도 수능시험이 온 나라가 떠들썩할 만한 행사임을 실감한다.
이를 보면 왕조시대 과거시험이 떠올랐다. 사실 과거시험은 꽤 의미가 있는 제도다.
중국 수나라 때 생겼다는데, 핏줄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면서 왕조시대 정권을 유지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되어왔다. 그런 만큼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수백 년 동안 다듬어져 온 과거시험제도는 공정하게 인재를 뽑기 위해 꽤나 합리적이고 정교한 장치를 갖췄다.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인간의 술수는 항용 법이나 제도를 앞서가기 마련이라 공정을 지향하는 과거시험에서도 온갖 부정과 타락이 판쳤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불평등이 존재했다. 조선시대에는 천민을 제외한 모든 이가 과거시험에 응할 수 있었지만 실제 몇 년간의 시험공부를 버텨낼 만한 재력과 여유를 가진 이들은 양반뿐이었다. 과거시험이 '그들만의 리그'가 된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경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 답안지에 작성자의 이름을 가리도록 하거나 필체를 대조해 부정을 방지하는 제도 등은 허울에 불과했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지음, 푸른역사)에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그 난맥상이 소상히 그려져 있다.
과거시험장인 과장(科場)은 지금과 달리 번호가 매겨진 좌석제가 아니었다. 또 문제를 인쇄한 답지를 나눠주는 게 아니라 문제를 적은 현제판을 보고 적어 와야 했다. 당연히 문제를 빨리 보고 답을 빨리 낼 수 있는 현제판 근처가 '명당' 자리였다. 때문에 쟁접(爭接)이라 하는 자리잡기 싸움이 벌어졌고 이를 위해 권세가들은 선접군이라 하는 힘깨나 쓰는 이들을 부렸다. 선접군끼리 주먹다짐을 벌이는 통에 맞아 죽고, 눌려 죽는 이가 여럿 나오곤 했다.
이뿐인가? 시험장에 책을 가지고 들어가는 '협서(挾書)'가 판을 쳐, 16세기 이수광에 의하면 너도나도 내놓고 책을 가지고 들어가 과거장이 마치 책가게 같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컨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문적으로 과거 답안지를 대신 지어주는 '거벽(巨擘)', 글씨를 대신 써주는 '사수(寫手)'와 팀을 이루기도 했단다.
이런 형편이었으니 18세기에 이르면 과거시험은 인재선발이란 본래 기능을 상실했다. 그나마 행정고시에서 시 한 수 지으라는 식의 출제였으니 나라를 경영할 인재 구하기란 그야말로 연목구어였다. 말로만 형평, 능력 위주를 떠들었으니 오히려 조선이 500년을 지탱한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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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