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20:30 (목)
[김성희의 역사갈피] 역사가 된 초월의 상소
[김성희의 역사갈피] 역사가 된 초월의 상소
  •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 jaejae99@hanmail.net
  • 승인 2020.11.24 1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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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기(官妓) 생활하며 정세에 눈 떠 … 벼슬아치의 첩이었지만 문장력 뛰어나
조선의 폐단 108조목 꼽아 일갈하는 상소는『상소』라는 책 머리 부분에 실려
"천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고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며 남편까지 탄핵 결기
사진=MBC 월화특별기획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이코노텔링그래픽팀.
사진=MBC 월화특별기획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이코노텔링그래픽팀.

"좋은 얼굴을 한 큰 도적(호면대적·好面大賊)이 조정에 가득하여 국사를 어지럽히니, 신하는 강도가 되고 백성은 어육이 되어 바야흐로 도탄에 빠져 거꾸로 매달러 있는 같은 근심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서릿발 같은, 혹은 내려치는 죽비 같은 이 구절은 1846년 조선 헌종 때 평안도 용천 기생 출신 초월이 올린 상소문에 나온다.

초월은 나중에 이조참의 대사성에까지 오른 심의순의 첩이었다. 초월은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오던 길에 용천 고을에 들은 심의순에 눈에 들어 서울로 '입성'했다.

기예는 물론 문장에도 능했다는 초월이 조선의 폐단을 108조목을 들어 지적한 글은 문장도 뛰어나지만 세태를 제대로 꼬집었다는 평을 듣는다. 변방 평안도에서 관기(官妓) 생활을 했기에 시중의 속사정을 절절히 알고 있는 덕분이었을 게다.

열다섯 살, 이 영악한 처자는 임금이 자신에게 내려준 숙부인이란 직첩을 거두어 줄 것, 재상집 도련님으로 자라 안하무인인 남편의 벼슬을 깎아달라는 영리한 '전략'으로 글을 시작한다. 이런 식이다.

"저의 남편의 기군망상(欺君罔上)의 죄는…천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고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으며…용서하신다 하더라도 삭탈관직하여 전리농토로 내쳐 10년 한정으로 두문불출케 하여 부지런히 성현의 글을 읽어 스스로 몸을 닦게 하는 것이 신의 평생소원이옵니다."

스스로 이렇게 낮췄으니 못할 말이 없는 게 당연하다. 벼슬을 사고파는 엽관제, 백성의 고혈을 빠는 환곡·군포의 폐단, 과거시험의 부정 등 국정 전반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정승판서의 이름을 들어 무능함을 평하고, 임금의 호색까지 지적한다. 이게 현실에 어느 정도나 근거하는 지는 감사는 5, 6만 금, 큰 고을 수령은 6, 7천 금을 먼저 바쳐야 임명될 수 있다는 엽관제의 시세를 제시하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조선시대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의외로 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제도를 갖추었음을 알게 된다. 그중 하나가 상소, 격쟁(擊錚) 등 언로(言路)의 확보를 위한 장치다. 주로 벼슬아치, 선비들이 낸 목소리였지만 임금에게 바른 소리를 전하는 최소한의 기능은 했다.

초월의 글은 여성, 그것도 기생 출신이 올린 상소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그래선지 《상소》(이전문 지음, 사회발전연구소)의 첫 머리에 실렸는데 책에 실린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에 반영되지 않은 듯하다. 책에 실린 바른 말, 정책 제안이 제대로 실현됐다면 조선왕조는 그런 최후를 맞지 않았을 테니까.

"고을 원의 책실(冊室·비서)이 본관보다 한층 더 심하게 굴어…각 고을 향장, 사령들의 10분의 1만 가려서 줄여도 문서를 거짓으로 꾸미는 폐단과 국고를 축내는 폐단이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역사에 묻혀버린 초월의 직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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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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