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22:00 (토)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42) 국내 첫 考試서 수석합격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42) 국내 첫 考試서 수석합격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0.12.21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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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1호 정통관료 … 경남 고성 중농 집안의 3대독자로 태어나
초등학교때부터 두각 … 전교 1등 독주끝 학생운동 본산 부산상고 입학
일제하 독립운동가 도운 아버지 닮아 불의 못보는 등 강직한 관료 생활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내세울 거라고는 명석한 두뇌 하나뿐인 '고성 촌놈' 김학렬이 '대한민국 최초의 고등고시'(1949년)에 수석 합격하면서 정통 관료의 길에 들어선다. 일에 관한 한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았던 그에게 규정에 어긋나는 윗사람의 명령이나 부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전쟁과 4·19 혁명, 5·16 쿠데타 등으로 혼란스러운 당시 대한민국 관료 사회에서 그의 청렴결백은 환영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학렬은 인재를 알아봐주는 '인생의 은인'을 만나 예산국 엘리트 과장에서 '최고 요직' 사세국장으로 이름을 날린다. 이후 군사정권이 신설한 경제기획원에 재무부 예산국을 이끌고 시집을 간다. 거기서 만난 '두번째 은인'의 도움으로 김학렬은 곧 기획원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김학렬은 1923년 경상남도 고성의 군청에서 일을 하는 아버지 김덕준과 집안 농사를 관리하는 어머니 빈유순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식이 귀한 집안이었다. 삼대독자로 태어난 그 앞에 병약한 형이 하나 있었으나 태어나고 한 해를 미처 넘기지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 있지 않아 그의 어머니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너는 네발 달린 짐승의 고기를 먹지 마라. 만일 그런 고기를 으면 새 아기도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단다. 그의 어머니는 1990년 부처님 오신 날 9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고성 촌놈' 김학렬이 '대한민국 최초의 고등고시'(1949년)에 수석 합격하면서 정통 관료의 길에 들어선다. 사진은 1958년 고등고시 시험장의 모습.
'고성 촌놈' 김학렬이 '대한민국 최초의 고등고시'(1949년)에 수석 합격하면서 정통 관료의 길에 들어선다. 사진은 1958년 고등고시 시험장의 모습.

그녀의 제사상에는 산적 대신 닭을 올린다.) 부부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절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좀 있는 집'은 부처님의 보살핌을 구하기 위해 마을 절에 신생아의 이름을 올리곤 했다. 그렇게 삼대독자가 된 쓰루는 집안에서 애지중지 키워질 수밖에 없었지만, 평소 언행으로 야단맞을 일은 없었다.

그의 집안은 부농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굶거나 삼대독자를 중학교에 보내지 못할 정도의 빈농도 아니었다. 내세울 것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부자나 권세가를 부러워할 일도 없는, 그저 농촌의 보통 집안이었다.

해방 후 그의 아버지 김덕준은 일제하에서 고성 출신 독립운동가들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많은 협조'를 하였다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 빈유순은 병석에 오래 누워 있던 김덕준의 병간호와 홀로 집안을 관리한 점을 평가받아 열녀상을 받았다. 일제 치하에서 쓰루 부모가 부역을 하거나 인심을 잃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불의를 못 참는 성격은 아버지를, 갸름하다 못해 나약한 인상을 주는 생김새는 어머니를 닮았다. 그는 아버지의 호랑이 같은 성격, 너무 곧아서 가끔 굵은 목소리의 험한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점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맑은 피부에 턱이 좁고 긴 얼굴 생김새, 그리고 꼼꼼한 성격은 어머니의 판박이였다. 남자라면 우선 통이 커야 했던 당시에 꼼꼼한 점은 '좀스러운' 결점으로 치부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의 여느 남자들처럼 '남자는 밖의 일, 여자는 안의 일' 식의 역할 분담에 철저해 집안일은 전혀 돌보지 않았다. 그것이 지나쳐 자식 키우기, 집안 살림은 물론이고 농사일, 집안 식솔 부리기에 집안 재산 불리기까지 여자가 맡아서 하도록 했다. 그 '전통'은 쓰루 부부로까지 이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을 차갑게 대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다정하거나 살가운 사람 또한 아니었다. 자식이 잘한 일에 대해서도 따뜻한 칭찬 한마디를 건네지 않았다. '내 자식은 잘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이었다.

쓰루의 집은 고성읍 끝자락 수남동 마을의 동남쪽을 향하고 있는, 초가집으로는 꽤 큰 규모였다. 여름이면 바로 앞에 펼쳐진 논에서 벼가 무르익고, 겨울이면 그 논에서 얼음을 타던 아이들이 어른 키를 훌쩍 넘는 대문 양쪽 황토벽에 기대어 따뜻한 볕을 누렸다.

정월 대보름이면 동네 청년과 아이들이 모여 짚 더미로 불놀이를 할 정도로 꽤 넓은 공터가 대문 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이들 놀이에 잘 끼는 편이 아니었다. 목이 긴 학 같은 생김새처럼 홀로 '고고'하게 지냈다. 집안의 대를 이을 유일한 자식으로서 어릴 때부터 될 성싶었던 그는 친구들과의 놀이보다는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커서도 교류의 범위가 좁았다. 일이나 가정사와 관련된 교분이 아니면 짐짓 먼저 나서 악수를 청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눈앞에 큰방 3개를 거느린 (초가) 본채가 일자로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 왼쪽 끄트머리에 그의 어머니와 일하는 아주머니가 동시에 안에서 음식을 준비할 수 있는, 부엌이라기보다는 광에 가까운 크기의 부엌이 있었다. 추수가 끝나고 며칠 뒤면 동네 청년들이 긴 사다리를 본채 처마 끝에 기대놓고 올라가 지붕의 짚 더미를 헤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참새를 잡을 정도로 초가 본채가 높고 컸다. 뒤편 서쪽 찔레 담장 안에는 400~500평 정도의 밭이 있었고, 본채의 한 귀퉁이에는 돼지 서너 마리가 들어가는 우리가 있었다. 가을이면 주먹보다 큰 대봉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감나무 두 그루도 한편을 버티고 있었다.

그는 애지중지 키워준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명석한 두뇌와 부모의 사랑으로 보통 아이와는 다른 수재로 자라고 있었다. 고성국민학교(초등학교)에서 그는 전 학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1등이었다.부산제2상업학교('부산2상'으로 불리다가 1950년 학제 개편 이후 3년제 부산상업고등학교가 됨)로의 진학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많이 뽑아야 한 군(郡)에서 한 명 정도밖에 뽑지 않던 당시에 그는 전형적인 부산2상 학생이었다. 일제하에서 부산2상은 조선인 전용 5년제 상업학교였고, 일본인 용은 부산1상이었다.

그의 가족은 '기러기 가족' 1세대였다. 부산2상 초기에는 어머니가 부산에 올라와 그의 유학을 도왔다. 농번기에는 고성에 가서 농사를 관리하고, 다시 부산에 와서 아들의 하숙생활을 돕는 삶이 몇 해 계속되었다. 당시의 많은 유학생처럼 쓰루도 자기 학업을 위한 부모의 희생에 보은하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좋은 학교를 나와 출세해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을 지고 있었다. 입신을 위한 그의 유일한 무기는 머리였다.

중학교 때 그는 연식정구 선수였다. 당시 정구는 '있는 집' 아이들이나 즐기는 운동이었다. 동문들은 그를 '보기 드문 준재로서 1학년 때부터 반장을 맡았던 홍안의 미소년'으로 기억한다. 뚜렷한 쌍꺼풀과 우뚝한 콧날은 그의 강한 의지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부산2상은 일제강점기 항일 학생항쟁의 중심이었다. 쓰루의 동기 중에는 1940년 부산항일학생의거(일명 '노다이 사건')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들이 많았다. 자유로운 언행을 억제하는 체제에 대한 반항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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