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5 23:45 (토)
◇김수종의 취재여록⑬'태극 배지' 단 빈민촌 아이들
◇김수종의 취재여록⑬'태극 배지' 단 빈민촌 아이들
  • 김수종 이코노텔링 편집고문(전 한국일보 주필)
  • diamond1516@hanmail.net
  • 승인 2020.11.27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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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운동장에서 행진곡 나팔소리에 맞춘 학생들의 '환대 사열'에 가슴이 뭉클해져
백영훈씨와 헤어진 후 '왜 중립국으로 갔을까'自問속 소설 '최인훈의 광장' 떠올라
아름다운 이파네마 해변을 벗어나서 찾아간 백 씨의 학교는 그야말로 빈민가에 있었다. 학교는 크지 않았다. 1960년대 한국의 초등학교 건물같이 허술한 목조 단층 건물이었다. 그는 이 빈민가 학교를 세워 세상에 이바지하고자하는 의지를 하rmsms
아름다운 이파네마 해변을 벗어나서 찾아간 백 씨의 학교는 그야말로 빈민가에 있었다. 학교는 크지 않았다. 1960년대 한국의 초등학교 건물같이 허술한 목조 단층 건물이었다. 그는 전쟁포로에서 자유를 찾아 빈민가 학교를 세워 세상에 이바지하는 사람이었다. 둘이서 브라질 곳곳을 같이 다닐 정도로 격의없이 사이가 됐다. 사진=이코노텔링 김수종 고문.

혼곤히 자고 깨어나 커튼을 열었더니 눈부신 광경이 펼쳐졌다. 야자수 줄기 사이로 부서지는 물결 위에 서핑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쪽으로는 바위산이 바다로 불쑥 뻗었고 백사장이 한없이 뻗어있었다. 어제 보았던 코파카바나 비치와는 다른 광경이었다. 코파카바나는 백사장을 따라 도로가 있고 도로와 붙어 호텔과 상점 빌딩이 즐비하게 뻗어있는 데 이곳은 한산한 해변이었다. 멀리 빌딩이 띄엄띄엄 보였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기다렸더니 백영훈씨가 학교 교장 선생님과 함께 차를 몰고 호텔 앞에 나타났다. 너무 해변 풍경이 가슴을 뛰게 해서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내 복장은 전날 의류상을 하는 교포로부터 선물로 받은 블루진이었다.

"이 해변이 코파카바나비치가 아닙니까?" 하고 물었더니 백 씨가 머리를 흔들면서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가 해변 이름을 알려주었지만 그런 이름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어차피 리우데자네이루 바닷가 사진이니 코파카바나 비치라고 하면 아무도 반론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8년 후 나는 이 해변이 이파네마 비치라는 걸 알게 됐다. 1992년 세계환경정상회의가 열린 곳이 바로 이파네마 비치에 건립된 컨벤션센터였고 나는 유엔취재 기자로서 이 정상 회의 취재를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8년 전과 비교해서 빌딩이 많아졌고 풍광이 달라졌지만 바다로 돌출한 바위산이 옛날 기억을 불러냈다. 이파네마 비치는 비키니 수영복보다 더 노출을 강조한 이파네마 수영복 패션을 탄생시킨 곳이자 1960년대 명성이 자자한 보사노바 재즈음악 '이파네마에서 온 아가씨들'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아름다운 이파네마 해변을 벗어나서 찾아간 백 씨의 학교는 그야말로 빈민가에 있었다. 학교는 크지 않았다. 1960년대 한국의 초등학교 건물같이 허술한 목조 단층 건물이었다. 교무실로 안내되어 음료를 마시면서 나는 백 씨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학생들이 모여 있는 학교풍경을 사진 찍는 일이라고 말했다. 백씨는 알았다며 교장에게 무언가 얘기했다.

얼마 후 백씨와 교장 선생님이 운동장으로 나가자고 했다. 교정은 텅 빈 채 연단만 달랑 있었다. 교장 선생님이 연단 위로 먼저 올라가 백 씨와 나를 연단 위로 올라오라고 했다. 영문을 모르고 운동장 연단위에 올라가 섰다. 사진기를 들고.

백영훈씨와 교장 선생님이 운동장으로 나가자고 했다. 교정은 텅 빈 채 연단만 달랑 있었다. 교장 선생님이 연단 위로 먼저 올라가 백 씨와 나를 연단 위로 올라오라고 했다. 영문을 모르고 운동장 연단위에 올라가 섰다. 사진기를 들고. 그 때 학생들의 사열을 받고 가슴이 뭉클했다. 사진(이과수 폭포앞에선 필자)=이코노텔링 김수종 고문.
백영훈씨와 교장 선생님이 운동장으로 나가자고 했다. 교정은 텅 빈 채 연단만 달랑 있었다. 교장 선생님이 연단 위로 먼저 올라가 백 씨와 나를 연단 위로 올라오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운동장 연단위에 올라가 섰다. 사진기를 들고. 그 때 학생들의 사열을 받고 가슴이 뭉클했다고 필자는 회상한다. . 사진(비옷을 입고 이과수 폭포앞에선 필자)=이코노텔링 김수종 고문.

그때 행진곡 나팔 소리가 들렸다. 몇 명으로 구성된 밴드를 앞세운 학생들이 열을 지어 학교 건물 뒤쪽에서 걸어 나와 연단 앞을 지나가면서 우리에게 경례를 했다. 이렇게 반별로 교단 앞을 지나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운동장 가운데 늘어섰다. 200명은 될 듯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초중고교생 모두 합쳐 700명이 다니는 학교였다.

나는 취재가 아니라 학생들의 사열을 받은 귀중한 손님이었던 셈이다.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었다. 교장 선생님이 나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몇 장 찍고 교실에서 학생들을 보겠다고 했더니 교장이 안내해줬다. 초등학생 반이었다. 내가 들어갔을 때 아이들은 정신없이 떠들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브라질 아이들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너무 황홀했다. 거의가 피부색이 까무잡잡하고 얼굴 모습이 제각각인 브라질식 혼혈아들이었다. 백인 아이는 거의 못 보았던 것 같다. 백인 흑인 인디언 원주민의 피가 섞인 혼혈아들, 하얀 눈자위에 까만 눈동자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미국 흑인아이들과도 달랐다.

빈 의자에 앉았더니 아이 몇 명이 다가와 내 주위를 둘러싸고 웃었다. 교장선생님이 아마 그러라고 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한 아이가 자기 셔츠에 붙은 배지를 가리켰다. 왜 그런가하고 봤더니 그 아이는 배지를 내 눈 가까이에 대는 것이었다. 배지 한가운데 팔괘가 없는 태극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다른 아이들을 보았더니 모두 태극마크가 달린 배지를 상의 가슴부분에 달고 있었다. 백명훈씨는 "브라질 학생을 브라질 선생님들이 브라질 교재로 교육하는 곳이지만 내가 태어난 나라의 상징으로 태극마크를 학생들 가슴에 달게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중립국포로 신분을 택한 한 사람의 전쟁포로가 가진 정체성의 혼란이 어떻게 정리되어 가는지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학생의 배지에 초점을 맞춰 사진을 찍고 LA에 돌아와서 창간 특집에 백명훈씨의 인생스토리와 태극마크를 배지로 선택한 브라질 학교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날 리우데자네이루 공항까지 배웅 나온 그와 헤어지면서 나는 고맙다는 말 외에 더 할 말이 없었다. 그의 표정에는 아스라한 그의 고국(한국인지 북한인지 모르지만)의 기억들이 가물거리는 것 같았다.

역사에서 배우는 한국전쟁과 중립국 포로의 관계는 알듯하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들이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면서 남한에 남기를 싫어한 진정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중립국 포로를 소재로 한 소설 최인훈의 '광장'에서는 남과 북의 생활에서 느끼는 이념과 이상의 괴리가 이명준으로 하여금 중립국을 향하게 했고 끝내는 비운을 맞이하지만 백영훈씨와 같은 청년은 당시 소설 속 지식인과는 달리, 이념적 갈등 못지않게 절박한 생존의 갈등을 경험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1954년 20대 청년 백영훈의 심리를 지배한 건 전쟁과 죽음의 극한적 상황이 몰고 온 패닉이었을 듯싶다. 포로의 신분으로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고, 총을 겨눴던 남한에 남는 것도 두렵지 않았을까.

그가 택한 중립국 포로의 길을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다만 그가 그 길을 택함으로서 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게 인생인 것 같다. 1984년 취재 당시 내가 그를 만났을 때는 태극마크를 가슴에 붙인 700명의 브라질 학생들이 그의 삶을 상징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마 그가 만든 학교의 학생들이 가슴에 태극마크를 더 이상 달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 학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취재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백 씨와 그의 학교소식은 듣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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