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2 00:20 (수)
산업화의 두 축 이끈 '정주영-유기정'의 35년전 '결의'
산업화의 두 축 이끈 '정주영-유기정'의 35년전 '결의'
  • 성태원이코노텔링기자
  • iexlover@hanmail.net
  • 승인 2019.02.11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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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정 중소기협 회장이 회관건립 예산 쪼들려하자, 전경련회장인 정주영회장이 나서 "싸게 지어줄께' 통근 화합 메시지
1984년 12월 21일 여의도 중소기업 회관 신축 기공식 광경(사진 왼쪽 두 번째가 당시 정주영 전경련 회장, 오른쪽 세 번째가 유기정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1984년 12월 21일 여의도 중소기업 회관 신축 기공식 광경(사진 왼쪽 두 번째가 당시 정주영 전경련 회장, 오른쪽 세 번째가 유기정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서울 여의도공원 서편에는 중소기업 회관이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다. 32년 전인 1987년 3월 3일 준공된 이 건물은 지상 9층짜리다. 맞은편 50층짜리 전경련 회관에 비해서는 볼 품 없지만 그래도 30년이 넘도록 중소기업계를 대변해온 뜻 깊은 건물이다.

이곳에는 대·중소기업간 상생 협력을 상징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숨겨져 있다. 한국의 80년대는 정치적으론 전두환 폭압 정권이 위세를 부렸던 시기였고, 경제적으론 중공업화가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중공업화를 견인했던 대기업들의 사세는 폭발적으로 커지고 국제화됐다.

반면 전체 기업체 수의 97~98%를 차지했던 중소기업들은 상대적 박탈감 속에 더욱 위축감을 느꼈던 시기였다. 우물 안 개구리 마냥 대기업 예속화의 길을 어쩔 수 없이 걷고 있었다. 지금은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을 그래도 ‘협력회사’라며 외견상 대우는 해주지만 당시에는 대놓고 ‘하청업체’라며 하대하기 일쑤였다.

이런 관행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30~40년 전에 비해서는 상당히 개선된 것도 사실이다. 여의도에 새 중소기업 회관이 들어섰던 80년대엔 ‘상생 협력’이란 말만 있었을 뿐 실제로는 먼 꿈나라 얘기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두환 정권이 중소기업 육성에 관심이 컸다는 점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상생 의지가 강하게 담긴 새 중소기업 회관이 탄생한 것이다. 결정적인 역할은 고(故) 정주영·유기정 두 기업인이 했다. 이들은 70~80년대에 걸쳐 각각 대기업과 중소기업계를 대표했던 한국 재계의 걸출한 인물들이었다. 중소기업 회관 준공 당시 삼화인쇄 오너 유기정(65)은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중소기업중앙회) 회장직을, 현대그룹 오너 정주영(72)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직을 각각 맡고 있었다.

당시 서울 종로구 공평동에 있던 중소기업 회관은 낡고 볼품이 없었다. 필자가 재계를 취재하던 당시 2층 구석에 있던 기자실로 올라가려면 좁은 나무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한참 들어야 했을 정도였다. 정 회장 주도로 1977년 여의도에 위용을 드러냈던 전경련 회관(2013년 50층짜리 현재의 빌딩으로 재건축 준공)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너무나 초라했다.

유 회장은 중소기업계도 21세기형 새 회관을 서둘러 갖춰야 한다고 판단했다. 부지와 예산 확보에 진력한 끝에 여의도 현재 위치에 어렵사리 부지는 마련했다. 하지만 건축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는 중소기업중앙회가 예산 일부를 정부 보조금에 의존하던 시절이라 무리를 할 수도 없었다.

유 회장은 고심 끝에 84년 어느 날 정 회장을 찾아 간다. 이들은 드디어 역사에 남을 만한 상생 화합의 결단을 내리게 된다. 결단의 주요 순간을 당시 취재 경험에 기초해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유 회장)나만 보면 잘 봐 달라 하시는데 이번엔 나 한번 잘 봐 주시요.” “(정 회장)나도 40년 전엔 중소기업자였으니 그렇게 말했던 거죠.” “(유)우리 예산으로 새 회관을 설계대로 지어주시면 전국 중소기업자가 오래오래 감사할 것이고, 돈대로만 지어주면 두고두고 원망할 것입니다.” “(정)설계대로(평당 180만 원) 짓되 돈은 평당 120만 원만 받으란 얘기 아니요.” “(유)그렇소.” “(정)좋아, 해줄게요.” “(유)그게 정말이요?” “(정)해준다는 데 웬 말이 많소.” “(유) 정말 감사하오.”

이에 따라 중소기업 회관 신축 공사는 현대건설이 맡아 했다. 두 사람은 사업가로써 서로를 인정하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다. 정 회장은 30~40년대에 중소기업(미곡상·차량수리업·토건업)을 거쳐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현대그룹을 일궈낸 기업인이다. 그에 비해 유 회장은 잠시 정계(국회의원)에 발을 담그기도 했지만 평생을 인쇄·출판업에 몰두한 중소기업인이다.

그들 사이엔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어느 날 정 회장이 “유 회장, 인쇄업 해서 돈 벌겠소. 나처럼 건설업을 하면 크게 성공할 것이요”라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유 회장은 “인쇄업은 조상의 얼이 담긴 문화 사업으로 단순히 돈벌이로만 평가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응수했다. 정 회장이 수긍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이들 두 기업인은 한국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상생 및 동반 성장 방향에 대해서도 큰 시사점을 남기고 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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