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은 제자리… 소득늘어 쌀소비 급등하고 중간 상인 농간 겹쳐
원윳값 적정 이윤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원활한 석유 공급에 차질
수출 때문에 환율 인상 불가피… 기습인상 놓고 언론과 숨바꼭질
그도 어쩔 수 없는 가격이 세가지 있었다. 쌀값, 기름값, 그리고 달러 환율이었다. 그중 쌀값이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쌀 생산은 늘지 않는 가운데 일반인의 벌이가 좋아지면서 쌀 소비가 급격히 늘어서였다.
쌀 소비가 가계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았고, 쌀값은 소비자물가의 바로미터 역할을 했다. 매점매석 등 일부 중간상인의 농간에 쌀값이 춤을 췄다.
성질대로 하자면 당장에 쌀값을 때려잡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때의 고미가(高米價)정책은 농공의 균형 발전을 위해 박 정권이 울며 겨자 먹기로 택한 정책이었다. 게다가 1969년, 1971년은 투표의 해였다.
기름값 또한 그의 손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시 국내 석유(정유)시장은 유공(油公)과 호남정유 두 회사가 분점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원유를 제공하는 것은 세계적 석유 재벌인 걸프와 칼텍스였다. 당시는 원윳값이나 환율이 오를 때마다 적정이윤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원활한 석유 공급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71년 양대 선거가 끝나자마자 6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기름값을 무려 45%나 올려주었다. 쓰루는 기름값을 두 달 만에 다시 올려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정말 우리나라 서해나 남해서 기름이 나도록 기도라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환율도 수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때때로 올릴 수밖에 없었다. 예를들어 한국 물가가 일본보다 10% 더 올랐다면 환율을 10% 올려야(평가절하) 해외시장에서 일본과 경쟁할 수 있다는 식이었다.
그는 "물가만 생각하면 환율을 올리지 않는 게 소망스럽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물가가 많이 올라 환율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수출과 성장을 위해서다"라고 평가절하(환율 인상)의 배경을 설명했다.
환율이 오르면 해외물자를 들여와서 만드는 물건의 값이 오를 수밖에 없다. 그도 거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환율이 올랐으니 일반물가가 오르겠구나' 하는 인플레 심리 때문에 업자가 미리 가격을 올리는 것은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 환율이 올랐다고 환율과 관계없는 품목의 값을 올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걸리기만 하면 한 놈 조져버린다. 낙동강 잉어가 뛰니 안방 목침이 뛴다더니 환율이 오른다고 왜 아무거나 뛰느냐"는 식의 겁박을 주곤 했다.
71년 6월 환율을 올릴 때였다. 마침 토요일이었다. 환율이 인상된다는 소문에 기자들이 부총리실로 몰려왔다. 그는 "그럴 일 없다"고 딱 잡아뗐다. 오후에 부인과 같이 영화를 보러 간다면서 예매한 극장표까지 보여줬다. 그날 은행 영업이 끝난 후 환율 인상이 발표되었다. (당시는 토요일도 은행 문을 열었다.)
월요일에 기자들이 그에게 "왜 거짓말을 해 골탕을 먹였느냐"고 항의했다. 그는 태연히 "세계 어느 나라나 경제장관은 환율에 대해서 거짓말을 할 권리가 있다"면서 "기자가 그런 거짓말을 믿느냐. 센스가 없어서 그렇다"며 놀리듯 대답했다.
그는 자주 그런 장난기 어린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연말연시나 추석 같은 '촌지의 계절'이 오면, 기획원 출입기자를 집무실에 한 사람씩 불렀다. 책상 위에는 두 개의 봉투가 놓여 있었다. 그는 기자에게 "둘 중 하나는 많이 들었다. 골라라" 하고 도전적으로 얘기했다. 기자가 하나를 집어 들면, 얼른 다른 봉투를 책상 서랍에 집어넣으면서 "바보~, 다른 봉투에 더 많이 들었는데……"라고 했단다. 봉투의 액수를 알 수 없는 기자들은 장난기 어린 그를 싫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