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4:40 (금)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18) 쌀ㆍ기름값ㆍ 환율엔 두손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18) 쌀ㆍ기름값ㆍ 환율엔 두손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0.07.06 10: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農工 균형발전명분…고미가(高米價)정책 울며겨자먹기로 고수
생산은 제자리… 소득늘어 쌀소비 급등하고 중간 상인 농간 겹쳐
원윳값 적정 이윤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원활한 석유 공급에 차질
수출 때문에 환율 인상 불가피… 기습인상 놓고 언론과 숨바꼭질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그도 어쩔 수 없는 가격이 세가지 있었다. 쌀값, 기름값, 그리고 달러 환율이었다. 그중 쌀값이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쌀 생산은 늘지 않는 가운데 일반인의 벌이가 좋아지면서 쌀 소비가 급격히 늘어서였다.

쌀 소비가 가계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았고, 쌀값은 소비자물가의 바로미터 역할을 했다. 매점매석 등 일부 중간상인의 농간에 쌀값이 춤을 췄다.

성질대로 하자면 당장에 쌀값을 때려잡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때의 고미가(高米價)정책은 농공의 균형 발전을 위해 박 정권이 울며 겨자 먹기로 택한 정책이었다. 게다가 1969년, 1971년은 투표의 해였다.

기름값 또한 그의 손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시 국내 석유(정유)시장은 유공(油公)과 호남정유 두 회사가 분점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원유를 제공하는 것은 세계적 석유 재벌인 걸프와 칼텍스였다. 당시는 원윳값이나 환율이 오를 때마다 적정이윤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원활한 석유 공급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쓰루의 긴축정책은 1970년 봄 들어서는 가계에까지 그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당시 일간신문에 가장 폭넓은 독자층을 자랑하던 ‘왈순아지매’의 만화가 정운영 화백과의 대담 주제도 물가상승과 긴축정책이었다.
쓰루의 긴축정책은 1970년 봄 들어서는 가계에까지 그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당시 일간신문에 가장 폭넓은 독자층을 자랑하던 '왈순아지매'의 만화가 정운영 화백과의 대담 주제도 물가상승과 긴축정책이었다.

71년 양대 선거가 끝나자마자 6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기름값을 무려 45%나 올려주었다. 쓰루는 기름값을 두 달 만에 다시 올려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정말 우리나라 서해나 남해서 기름이 나도록 기도라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환율도 수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때때로 올릴 수밖에 없었다. 예를들어 한국 물가가 일본보다 10% 더 올랐다면 환율을 10% 올려야(평가절하) 해외시장에서 일본과 경쟁할 수 있다는 식이었다.

그는 "물가만 생각하면 환율을 올리지 않는 게 소망스럽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물가가 많이 올라 환율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수출과 성장을 위해서다"라고 평가절하(환율 인상)의 배경을 설명했다.

환율이 오르면 해외물자를 들여와서 만드는 물건의 값이 오를 수밖에 없다. 그도 거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환율이 올랐으니 일반물가가 오르겠구나' 하는 인플레 심리 때문에 업자가 미리 가격을 올리는 것은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 환율이 올랐다고 환율과 관계없는 품목의 값을 올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걸리기만 하면 한 놈 조져버린다. 낙동강 잉어가 뛰니 안방 목침이 뛴다더니 환율이 오른다고 왜 아무거나 뛰느냐"는 식의 겁박을 주곤 했다.

71년 6월 환율을 올릴 때였다. 마침 토요일이었다. 환율이 인상된다는 소문에 기자들이 부총리실로 몰려왔다. 그는 "그럴 일 없다"고 딱 잡아뗐다. 오후에 부인과 같이 영화를 보러 간다면서 예매한 극장표까지 보여줬다. 그날 은행 영업이 끝난 후 환율 인상이 발표되었다. (당시는 토요일도 은행 문을 열었다.)

월요일에 기자들이 그에게 "왜 거짓말을 해 골탕을 먹였느냐"고 항의했다. 그는 태연히 "세계 어느 나라나 경제장관은 환율에 대해서 거짓말을 할 권리가 있다"면서 "기자가 그런 거짓말을 믿느냐. 센스가 없어서 그렇다"며 놀리듯 대답했다.

그는 자주 그런 장난기 어린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연말연시나 추석 같은 '촌지의 계절'이 오면, 기획원 출입기자를 집무실에 한 사람씩 불렀다. 책상 위에는 두 개의 봉투가 놓여 있었다. 그는 기자에게 "둘 중 하나는 많이 들었다. 골라라" 하고 도전적으로 얘기했다. 기자가 하나를 집어 들면, 얼른 다른 봉투를 책상 서랍에 집어넣으면서 "바보~, 다른 봉투에 더 많이 들었는데……"라고 했단다. 봉투의 액수를 알 수 없는 기자들은 장난기 어린 그를 싫어할 수 없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 229번지 (서울빌딩)
  • 대표전화 : 02-501-63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장재열
  • 발행처 법인명 : 한국社史전략연구소
  • 제호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 등록번호 : 서울 아 05334
  • 등록일 : 2018-07-31
  • 발행·편집인 : 김승희
  • 발행일 : 2018-10-15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이코노텔링(econotelling). All rights reserved. mail to yunheelife2@naver.com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장재열 02-501-6388 kpb11@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