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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8)'그때 그들'㊦권력의 종언?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8)'그때 그들'㊦권력의 종언?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0.05.04 1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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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행과 비리의 상징 80대 중반의 베를루스코니, 伊정가 입김 여전
좌파 의원이 우파집권 돕는 장면은 이탈리아 특유의 정치문화 노정
상류층 퇴폐 묘사 伊감독들 탁월… 세르빌로리의 원숙한 연기눈길

오동통 살진 양 한 마리.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바다처럼 펼쳐진 푸른 잔디 위에 서 있다. 눈을 뜨더니 천천히 대저택 안으로 들어간다.

지중해 최고급 레스토랑을 연상시키는 저택의 로비는 귀머거리 세상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TV에서는 한 퀴즈 쇼가 진행 중이다. 이 역시 소리가 없다. 에어컨이 작은 진동을 일으키며 자동으로 꺼지려 한다. 그러자 양이 '음매~' 울며 조금씩 떨기 시작한다. 마침내 에어컨이 꺼진다. 그러자 양이 쓰러진다. 그리고 죽는다.

파울로 소렌티노(Paolo Sorrentino) 감독이 2018년 만든 이 영화 <그때 그들>의 오프닝 신이다. 누구라도 뭔가에 대한 상징이라 생각할 것이다. 당연히 이 상징 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해도 된다. 지난 번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에서도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세 편 에피소드 모두에 등장하는 '에로스와 프쉬케 신화'와 '장례식'의 상징을 풀어봤다. '위기가 일상이 된 세상, 그로 인해 일상이 위기가 된 세상에서 행복이란 결실을 맺는 에로스-프쉬케의 사랑은 없다'는 해석이었다. 물론 필자의 해석이다. 그러니 '정답'이라 할 수 없다. 그럴듯한 해석은 또 있을 수 있으니까.

필자 생각에는, <그때 그들>의 오프닝 신에 등장하는 상징 해석은 <나의 사랑, 그리스>의 경우보다 훨씬 난해하다. 처음에는, 오동통하고 귀여운 한 마리 양이 그저 악하고 강한 권력자로 인해 죽어가는 약한 국민을 대변하는 것인가 생각해 봤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기독교 문명권이다. 조심해야 한다. '양'이 갖는 상징성이 특별한 경우일 수 있다. 구약시대, '양'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에 이어지고, 신약시대에 이르면 예수와 그의 백성을 위한 구원에까지 이어진다. 조나단 드미(Jonathan Demme) 감독의 1991년 작 <양들의 침묵>에서 '양'이 갖는 상징해석을 보라. 단순히 주인공 클라리스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라는 것에서부터 종교적 구원에 이르기까지 해석의 스펙트럼은 무척이나 넓다.

<그때 그들>의 오프닝 신에 등장하는 양에 대한 상징 해석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은 영화가 끝날 무렵 깨닫게 된다. 대저택이 있던 마을은 지진으로 황폐해 졌고 현장방문한 주인공 베를루스코니는 지진으로 틀니를 잃은 할머니의 볼을 어루만지며 슬픈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와 주민을 위해 두 가지 약속을 한다. 할머니를 위해서는 "틀니를 찾아 주겠다" 했고 주민들에게는 "새 집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임시 대피 텐트 밖에 서 있던 주민들의 외침이 들린다. "우리는 예수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방관들은 지진으로 무너진 교회 안에서 조심스럽게 뭔가를 꺼낸다. 예수 동상이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한. 이어 피로에 찌든 소방관들의 넋 나간 모습이 이어지며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끝을 맺는다.

오프닝 신에 등장하는 양(羊)
오프닝 신에 등장하는 양(羊)

영화의 오프닝 신과 엔딩 크레딧을 연결시켜 보면 영화 속 '양'으로 표현하려는 상징에 대한 '가설'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기독교 속 양은 희생양이요, 희생양은 예수며,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함으로써 자기 백성의 구원이라는 목적을 달성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창세기에서 보듯, 하나님의 사자가 "네 아들 이삭에게는 손을 대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시작된다. 기독교에서 '말씀'은 곧 '신'이다. 요한복음서를 보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로 책을 연다. 기독교 시각에 보면 '말씀'이 만물을 소생시켰으니 '말씀'이 없는 것은 곧 '죽음'일 뿐이다.

엔딩 크레딧의 예수상. 오프닝 신에 등장하는 양과 함께 이 두 가지 상징을 통해 영화 전체를 읽을 수 있는 방식을 찾아보자.
엔딩 크레딧의 예수상. 오프닝 신에 등장하는 양과 함께 이 두 가지 상징을 통해 영화 전체를 읽을 수 있는 방식을 찾아보자.

하지만 영화 속 '양 이야기'는 뒤틀려 있다. 양이 있는 곳에 '말씀'은 없다. 오직 침묵뿐이다. 물론 '소리'가 하나 있기는 하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음. 그나마 그 소리마저 멈추자 양이 죽는다.

엔딩 크레딧의 예수도 '죽은 예수'다. 껍데기를 표상하는 조각상에 불과하다. 생명력이 없다. 노인에게는 틀니를, 주민에게는 집을 주겠다는 베블루스코니의 말에 군중은 "우리는 예수를 필요로 한다"며 그를 높인다.

영화는 '베블루스코니=예수'를 주장하려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는 영화 내내 타락한 최고 권력자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독이 전달하려는 의미는 따로 있을 것이다. 혹시 베블루스코니를 가리켜 "'말씀'이 없는 침묵 속에서 영(靈)이 죽은 빈껍데기 예수에 불과하다"는 것 아닐까?

이 같은 해석은 가능해 보인다. 논리적이기도 하거니와 이야기 전체와도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더 간단한 해석도 있을 수 있다. 아메바처럼 단순하게 느낌으로만 접근하는 방식이다. 오프닝 신에 등장하는 '양'은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왜? 영화는 그야말로 관객을 압사(壓死)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러닝 타임이 그렇다. '1부 욕망의 부활'과 '2부 끝나지 않은 유혹' 등 두 편으로 제작된 영화는 225분, 무려 4시간 가까운 분량이다. 극장 상영판은 이를 합치고 잘라 짧게 했다지만 그래도 150분, 2시간 30분이나 된다. 게다가 소렌티노 감독은 이전 작품 <그레이트 뷰티>나 <일 디보>에서 보듯 롱 테이크 숏을 즐겨 쓰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기나 긴 러닝 타임에 기나 긴 숏. 누구라도 지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탐미주의자'로 정평이 나 있는 그가 아무리 화려한 컬러와 다채로운 음악, 미녀들의 퇴폐적 파티, 그리고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배우 토니 세르빌로(Toni Servillo)의 명연기를 버무려 놓았다 해도 일반 관객으로부터 '지루하다'는 평가를 피해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게다가 시작한 지 1시간 지난 뒤에서야 겨우 주인공, 그것도 여장으로 나타난 베를루스코니를 볼 수 있다. 지루한 것을 넘어 괴이하기까지 한 영화다.

이 영화 <그때 그들>은 다른 많은 영화를 상기시킨다. 이탈리아 상류층의 퇴폐적인 삶을 그렸다는 측면에서는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 감독의 1961년 작 <달콤한 인생(라 돌체 비타)>을, 일반 관객이 받아들이기 거북한 변태적인 성과 관련해서는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 감독의 1969년 작 <피그스타이>를, 그리고 추잡한 파티와 관련해서는 준(準) 포르노 취급을 받는 틴토 브라스(Tinto Brass) 감독의 1979년 작 <칼리귤라>을 떠올리게 한다. 또 변태적 성과 늘 함께 하는 마약은 이 글 4회 째에서도 다룬 적이 있는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감독의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와도 이어진다.

특이한 것은, 지금 거론된 이 모든 영화의 감독들은, 절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데, 모두 이탈리아의 피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스콜세지 감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감독들이다. 스콜세지 감독은 비록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이탈리아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당연히 이탈리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쩌면 이탈리아 감독들은 상류층의 퇴폐적인 삶을 영화로 만들어내는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철의 여인'
영화 '철의 여인'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오르는 영화는 스토리, 이미지, 주제 등과 관련해 비슷한 영화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때 그들>과 전혀 상반된 이미지의 영화들도 있다.

이코노텔링의 <세계경제위기 역사> 5회에서 다뤘던 <철의 여인>도 그중 하나다. 물론 공통점도 있다. <철의 여인>의 주인공은 영국의 현대 정치를 대변하는 마가렛 대처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 이 두 영화 모두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를 그렸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주연 배우들의 메소드 연기도 눈길을 끈다. 세르빌로는 베를루스코니보다 더 베를루스코니다운, 스트립은 대처보다 더 대처다운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그때 그들' /'철의 여인'은 지나치게 많은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는 반면 '그때 그들'은 지나치게 적은 분량의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어 대조된다.
영화'그때 그들' /'철의 여인'은 지나치게 많은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는 반면 '그때 그들'은 지나치게 적은 분량의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어 대조된다.

하지만 두 영화가 '역사를 쓰는 방식'은 너무나 다르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철의 여인>은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역사적 사실을 담으려 했다.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역사의 편린(片鱗)들은 관객에게 극도의 혼란을 가져다준다.

영국 현대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는 관객들마저 현기증을 느끼게 만든다. 특기할 만한 역사관도 없기에 더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역사의식 없이 쓰인 조각난 역사는 더 이상 '역사'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그들>은 반대다. 4시간 가까운 러닝 타임 중 진지하게 역사적 사실을 다룬 분량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1/3? 1/4? 아니면 1/5?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러닝 타임 대부분을 마약과 섹스, 퇴폐적인 환락 파티에 할애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럼 그 같은 '개인사'는 사실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누구도 한 개인의 사생활, 그것도 밤의 사생활을 그토록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감독도 그렇게 말한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베를루스코니의 사생활은 상상력의 산물"이라 했다.

상상력의 산물. 기나 긴 러닝 타임 외에 필자가, 관객의 한 사람으로, 이 영화 <그때 그들>에 압살당하는 느낌이 드는 또 다른 이유다. 필자는 예전 글에서 <철의 여인>을 보며 진이 빠졌다고 했다. 너무 많은 역사적 사실의 조각을 일일이 확인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 영화 <그때 그들>은 반대다. 너무 적은 역사적 사실과 과도한 허구가 뒤섞여 있다. 과도한 허구에서 양이 적은 역사적 사실을 찾으려는 작업. 이는 마치 한류(寒流)와 난류(暖流)의 뒤섞인 바다에서 하나의 물줄기를 찾으려는 시도처럼 힘든 일이었다.

보자. '영화'와 '역사'의 관계를 보려는 시각에서 가장 기본적인 영화의 정보는 그 영화가 그리는 '시대 배경'에 있다. 도대체 언제를 그린 영화인가, 그 시기를 어떤 관점에서 그리고 있는가? '영화'를 '역사'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1차적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또 보자. <그때 그들>은 언제 시점을 그린 영화일까? 영화가 그리는 시점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일까? 당연히 궁금증이 생긴다. 하지만 영화는 이에 대한 어떤 명시적인 정보도 주지 않는다. 그러니 어떤 비평이나 관람 후기에서도 영화의 배경이 되는 정확한 시점을 찾아내기 어렵다. 일반적인 비평가나 관객의 입장이라면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됐을 것이다.

2008년 총선에서 투표하고 있는 베를루스코니.
2008년 총선에서 투표하고 있는 베를루스코니.

하지만 영화를 역사언어로 보는 관점이라면 얘기는 전혀 다르다. 영화가 그리는 정확한 시점을 알지 못한다면 영화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반감된다. 어쩌면 분석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필자가 영화의 배경 시점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영화 <그때 그들>은 이에 대한 실마리를 쉬 내주지 않는다. 4시간 가까운 러닝 타임 동안 이 정보를 찾는 데 들인 시간과 노력을 생각해 보라. 필자가 왜 오프닝 신에 등장하는 '양'을 '압살당하는 관객'에 비유하게 되는지 알 게 될 것이다.

당선 후 그의 정계 컴백을 다룬 영국 『더 이코노미스트』의 2008년 4월 커버스토리. 참고로 아바의 세계적인 히트곡이자 뮤지컬 제목인 ‘맘마미아’는 놀라움을 표현하는 이탈리아어다. 뜻이나 의미는 ‘엄마야!’ 하는 우리나라 표현과 거의 같다. 재미있는 것은 2018년 발표된 뮤지컬 영화 '맘마미아2'의 원 제목은 『더 이코노미스트』의 이 제목과 동일하다는 점이다.
당선 후 그의 정계 컴백을 다룬 영국 『더 이코노미스트』의 2008년 4월 커버스토리. 참고로 아바의 세계적인 히트곡이자 뮤지컬 제목인 '맘마미아'는 놀라움을 표현하는 이탈리아어다. 뜻이나 의미는 '엄마야!' 하는 우리나라 표현과 거의 같다. 재미있는 것은 2018년 발표된 뮤지컬 영화 '맘마미아2'의 원 제목은 『더 이코노미스트』의 이 제목과 동일하다는 점이다.

지난 회에서 말했듯 베를루스코니는 1994년부터 2011년의 17년 동안 모두 세 차례 총리를 지냈다. 총리 재임 기간은 대략 약 9년 4개월. 1994년 5월부터 1995년 1월까지 약 8개월, 2001년 6월부터 2006년 5월까지 약 5년, 그리고 2008년 5월부터 2011년 11월까지 약 3년 6개월 기간이었다.

영화는 베를루스코니가 총리가 아닌 시점에서 총리가 된 직후의 시기를 다룬다. 그러니 후보 시점은 세 가지로 추론 가능하다. ①1994년 5월 전후 ②2001년 6월 전후 그리고 ③2008년 5월 전후다.

영화의 시기적 배후는 이 셋 중 언제일까? 알기가 쉽지 않다. 이미 말했듯 영화는 이에 대한 어떤 설명도 제시하지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 어디서고 그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영화는, 고맙게도, 극중 배경 시기에 대한 작은 단서를 하나 남겨뒀다. 그 단서를 찾는다면 누구라도 영화의 시기적 배경을 알 수 있다. 영화의 시기적 배경을 알게 해 주는 단서. 있다. 영화 '1부 욕망의 부활' 중 1시간 10분 조금 지나서다. 영화 속 베를루스코니는 그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가수와 대담하는 장면에서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시 집권할 수 있을까, 내 나이 이미 70이야. 좌파가 계속 집권하면 5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그때 내 나이는 일흔다섯이라고!"

이 대사는, 필자에게, 그야말로 사막 속 오아시스처럼 목마름과 애탐을 적셔준다. 그리고 코끼리의 팔이나 다리나 코가 아닌 코끼리 전체를 볼 수 있는 혜안을 준다. 이 장면을 통해 비로소 영화 전체의 맥을 분명하게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보자. 베를루스코니는 1936년생이다. 나이 70이 되는 해는 2006년. 이 해에는 베를루스코니의 우파 내각 5년을 총평하는 중요한 총선이 있었고 이 총선에서 그는 좌파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만다. 과거 집권기 5년에 대한 공(功)도 인정받지 못했고 향후 5년에 대한 미래도 보장받지 못했던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베를루스코니 개인의 정치 활동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앞서 말했듯 1994년 정계 입문과 거의 동시에 총리가 된 인물이다. 기업인으로서의 성공은 물론 정치인으로서도 대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러나 첫 번째 이 영예는 1년도 채 못 가 사그라들었다. 취임 전 있었던 탈세와 뇌물죄 등의 혐의로 심한 정치 공세에 시달렸으며 결국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그는 1년 뒤 다시 실시되는 임시 총선에서 재승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1996년 임시 총선에서 쓰디 쓴 고배를 들게 된 것이다. 큰 차이로 졌으면 오히려 마음 편히 잘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승패는 그야말로 박빙으로 끝이 난다. 그가 이끄는 우파 연합은 40.3%, 반대파인 좌파 연합은 42.2%를 득표, 불과 1.9% 차이로 권력을 놓치게 된다. 하지만 5년 뒤 그는 기분 좋게 복수한다. 2001년 총선에서 승리의 트로피를 낚아챈 것이다. 더 기분 좋았던 상황이었다. 5년 전 보다 더 적은, 득표율 1.7%의 근소한 차이로 승리한 것이다.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표차였을 것이다.

이 승리를 발판으로 베를루스코니는 신화(神話)를 쓴다. 이탈리아 정치사상 최초로 임기 5년을 꽉 채운 총리가 된 것이다. 이탈리아 정국은 불안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다당제와 연정, 그리고 연정 탈퇴로 바람 잘 날 없는 게 이탈리아 정치판이다. 그의 '총리 임기 5년 유지'는 그가 세운 여러 기록 중 하나다. 그리고 2006년 그는 다시 총선을 치르게 된다. 이때 선거는 처음부터 승리를 예단하기 어려웠다. 좌우를 대표하는 리더 베를루스코니와 로마노 프로디(Romano Prodi)는 이미 구시대 인물이었던 데다가 인기도나 공약 측면에서도 좌우 양측은 거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물론 승패는 났다. 좌파 연정 '승', 우파 연정 '패'였다. 하지만 결과는 승자나 패자 모두에게 곤혹스러웠다. 승패의 차이가 1996년이나 2001년보다 더 적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훨씬 더. 우파 득표율은 49.7%, 죄파 득표율은 49.8%로 양측의 득표율 차이는 불과 0.1%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수점 이하 둘째 자리까지 가면 차이는 더 준다. 불과 0.07% 차이였다. 패자라면 누구라도 아쉬울 수밖에 없다. 재개표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베를루스코니는 실제로 그랬다. 선거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재개표를 요구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이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법원까지 나섰다. 그리고 '선거 결과 유효' 판정이 나왔고 그때서야 논란이 끝이 났다. 이후 좌파 연합을 이끈 프로디는 총리에 취임해 정국을 이끌었다. 하지만 불안했다.

좌파연정이 우파연정에 비해 다수당이 될 수 있었던 근거는 겨우 상원의원 의석 한 석 차이였기 때문이다. 한 명이라도 탈퇴해 우파 연합에 가세한다면 프로디가 이끄는 좌파연합은 순식간에 소수당이 되고 내각은 해체될 처지였다.

우려했던 상황은 1년 뒤 터졌다. 그 시발점을 제공한 것은 클레멘테 마스텔라 법무장관이었다. 2008년 1월 그와 그의 아내가 부패 스캔들로 검찰 조사를 받자 법무장관 자리를 사임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 없었다. 하지만 그는 퇴임 후 느닷없이 "좌파 정권은 끝났다"는 선언과 함께 좌파연합을 탈퇴했다. 그리고 자기 편 의원과 함께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우파연합으로 넘어갔다. 그는 기독민주당의 당수였다. 비록 의원 수 3명에 불과했지만 1명 우위로 간신히 유지됐던 좌파연합의 다수당 지위는 이로써 끝을 맺는다. 프로디 총리는 그해 1월 24일 상원의원 신임투표에서 패하고 권좌에서 물러난다.

2006년 총선과 프로디 총리의 취임, 마스텔라 법무장관의 배신, 상원의원 신임투표와 패배, 프로디 총리의 사임. 영화와 관련해 1년 반 남짓한 이 기간 중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영화 <그때 그들>이 다루는 시간대가 주로 이때이기 때문이다. 영화와 관련해 이 시기가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정치인 베를루스코니의 방탕한 사생활에 집중했던 영화가 유독 이 과정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탓이다. 그러니 이 대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영화 전반에 대한 이해도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영화는 베를루스코니의 판 뒤집기 시도를 알려준다. 집권당 의원을 자당으로 영입해 집권당을 다수당에서 소수당으로 만든 뒤 내각을 무너뜨리고 총선을 다시 치른다는 전략이다. 영화는 이 과정을 상세히 그린다. 누구에게는 돈으로, 누구에게는 사업으로, 누구에게는 여자로, 누구에게는 자리로 탈당을 유도한다. 그리고 마침내 베늘루스코니는 다시 총리에 등극하며 왕좌를 차지한다. 영화에서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 사이 총선을 다시 치렀을 것이라는 상상은 어렵지 않다.

영화 <그때 그들>에서 역사적 사실 여부를 따질만한 거의 유일한 대목이 바로 이곳이다. 대부분의 러닝 타임은, 여러 번 말했듯 베를루스코니의 은밀하고 음란하고 지저분하고 변태적인 사생활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생활'의 사실 여부를 확인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베블루스코니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이다. '의원영입' 등의 내용은 그나마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거의 불가능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것을 사실로 밝힌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에서 제시하는 '탈법ㆍ불법 의원영입' 스토리는 '음모론' 성격이 강하다. 또한 보통의 의심스러운 사건에는 다수의 음모론이 따르기 마련이다. 2008년 마스텔라 법무장관의 변심과 관련해서도 또 다른 '음모론'이 있다. 당시 파다하게 돌았던 소문은 법무장관의 배후에 바티칸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프로디 총리가 이끄는 좌파연합은 동성애나 낙태문제를 긍정적으로 보는 등 바티칸과 정면으로 부닥쳤다. 결론적으로 이를 고깝게 본 바티칸이 좌파연합의 붕괴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꽤 설득력 있는 얘기다. 하지만 이 역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별 근거 없는 '음모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영화 <그때 그들>에 대한 결론은 이렇다.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영화 대부분을 차지하는 베를루스코니의 사생활이야 어차피 역사적 검증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나마 역사적 사실이라 할 수 있는 2008년 선거와 관련된 것 역시 '음모론'에 기초한다. 러닝 타임이 무려 4시간 가까운 영화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 여부를 따질 부분이 별로 없다니. '영화로 역사 쓰기'를 검토하는 입장에서 영화가 허망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인생 3부작에 포함되는 '그레이트 뷰티'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인생 3부작에 포함되는 '그레이트 뷰티'

하지만 최종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직 일러 보인다. 어쩌면 영화 <그때 그들>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할 필요가 없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영화 <그때 그들>은 소렌티노 감독의 '인생 3부작' 또는 '욕망 3부작'이란 평가를 받는다. 인생의 아름다움과 그에 대한 욕망을 그린 <그레이트 뷰티>와 젊음-늙음-죽음의 의미를 특별한 시각에서 바라 본 <유스>,

그리고 이 영화 <그때 그들>은 돈-권력-쾌락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그들을 갖으려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앞 선 두 작품 모두 탁월하다. 특히 <그레이트 뷰티>는 2014년 그에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선사하며 그를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인생 3부작에 포함되는 '유스'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인생 3부작에 포함되는 '유스'

이 같은 시각에서 본다면 영화 <그때 그들>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 만일 <그때 그들>이 정치인 베를루스코니의 삶을 그린 게 아니라 베를루스코니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탐욕을 그린 것이라면 어떤 평가가 내려질까. '역사적 사실'이나 '역사관' 보다는 인간의 탐욕을 드러내는 '영화언어'가 훨씬 중요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 영화는 그 같은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감독 역시 한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베를루스코니를 정치인 이전에 '남자'로 봤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같은 측면에서라면 <그때 그들>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화려한 컬러와 미장센은 그의 탐미주의적 '영화언어관'을 다시 일깨워준다.

여기에 이탈리아의 명배우 토니 세르빌로의 놀라운 연기가 있다. 이 영화를 다루며 그에 대한 설명을 뺀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날 것이다. 1959년생인 그는 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국민배우로 여겨질 만하다. 그는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완전히 동화된 연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특히 소렌티노 감독과의 인연이 깊다. 소렌티노 감독의 데뷔작 <엑스트라 맨>을 시작으로 <사랑의 결과>, <일 디보>, <그레이트 뷰티> 등 <그때 그들>을 포함해 모두 5편의 영화에 출연, '소렌티노의 페르소나'라는 이야기까지 듣는다. 특히 2013년에는 <더 그레이트 뷰티>로 26회 유럽 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 그의 연기 인생의 대표작이 됐다.

그렇다면 또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이 영화 <그때 그들>은 '영화를 통한 역사 읽기'의 측면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물론 그렇지 않다. '영화를 통한 역사 읽기' 측면에서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검토해 보자. 이를 위해서는 영화에 대한 비교 분석 방식이 좋을 것 같다. 흔히 뚜렷하게 비슷하거나 뚜렷하게 다른 두 편의 영화를 비교 대상으로 삼아 영화를 분석한다면 우리는 특정 영화에 대한 훨씬 풍부한 정보를 얻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정보'는 더 나은 '평가'를 가능하게 해 줄 것이다.

비교 대상이 되는 영화는, 재미있게도, 한국 영화다. 제목이, 형식면에서는 조금 다르지만 내용면에서는 완전히 동일하다. 임상수 감독의 2005년 작 <그때 그 사람들>이다. <그때 그들>이나 <그때 그 사람들>의 제목이 '의미면에서는 같다'는 평가를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물론 영화 원제는 좀 다르다. 영화 <그때 그들>의 원제는 <로로(Loro)>로 이탈리아어로 '그들'이란 뜻이다. '그때'란 단어는 한국판에서 첨가된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제목이든 내용면에서든 별 문제 없어 보인다.

한국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은 이탈리아 영화 <그때 그들>과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다. 주요 주제도 비슷한 구석이 많다. 최고 권력자가 밤에 즐기는 사생활이다. <그때 그 사람들>에는 1970년대 말 한국의 최고 권력자 박정희의 사생활이, <그때 그들>에는 2006년 즈음 이탈리아 최고 권력자 베를루스코니의 사생활이 있다. 또한 두 권력자의 사생활에는 노래와 춤이 있다. 최고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는 아첨꾼이 있고 여자를 제공하는 채홍사(採紅使)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중요한 역사 왜곡이 있다는 점도 두 영화의 공통점일 수 있다. 박정희의 마지막 만찬에서 가수는 일본 노래를 부르지 않은 것은 물론,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김재규도 다카키 마사오를 외치지는 않았다. 또한 베를루스코니가 좌파연합 붕괴를 목적으로 돈과 여자와 자리 등을 내걸고 상원의원 영입을 했다는 것 역시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두 감독은 이 같은 '거짓'을 통해 두 권력자의 내면을 고발한다. 박정희는 일제를 그리워하는 친일파요,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국가나 국민은 망가져도 상관없어 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영화 '그때 그 사람들'
우리나라 영화 '그때 그 사람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두 영화가 갖는 차이점이다. 채홍사를 보자. 베를루스코니에게 쾌락을 주고 권력의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으려는 <그때 그들>의 채홍사는 수십 명의 미희를 동원해 베를루스코니의 별장 앞에서 광란의 파티를 벌인다. 채홍사들 간 경쟁도 치열하다. 그러나 <그때 그 사람들>의 채홍사는 다르다. 군인 신분이어서 "여자를 데려오라"는 명령에도 어쩔 수 없이 복종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는 자신의 일을 혐오하고 정상적인 군인으로 복귀하기를 바란다.

'그때 그들'을 우리나라 영화 '그때 그 사람들'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둘 다 최고 권력자의 사생활을 다루고 있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함께 놀 여성을 찾아주는 채홍사의 역할, 권력자에 대한 저항 등의 차이를 보라.
'그때 그들'을 우리나라 영화 '그때 그 사람들'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둘 다 최고 권력자의 사생활을 다루고 있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함께 놀 여성을 찾아주는 채홍사의 역할, 권력자에 대한 저항 등의 차이를 보라.

최고 권력자에 대한 항거에도 차이가 있다. <그때 그들>에서 등장하는 유일한 투사는 베를루스코니의 아내 베로니카 라리오(엘레나 소피아 리치 분)다. 그는 영화 속 그는 "이탈리아 전체를 홀려도 나는 홀리지 못할 것"이라는 말로 최고 권력자를 비난하며 이혼을 불사한다. 실제로 라리오는 2009년 별거를 시작했고 2014년 이혼한다. 그러나 <그때 그 사람들>의 항거자는 '이혼'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최고 권력자의 심복이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마침내 명줄을 끊어내고 만다.

잘 한 것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기 어려운 이탈리아의 최고 권력자 베를루스코니. 하지만 그 주변에는 아첨꾼으로 넘쳐난다. 그들로 인해 베를루스코니는 온갖 악행에도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고 1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유지한다. 2020년 현재 그가 80대 중반의 고령에도 지금껏 정치 일선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 반면 박정희의 상황은 다르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경제기적의 주역이었으며 사생활도 베를루스코니와 비교하면 그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2020년 현재 그에 대한 평가도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우리는 <그때 그들>에서 엄격한 방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밝혀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영화를 통해 소렌티노 감독의 두 가지 '역사관'을 읽어낼 수 있다. 하나는 의도했던 것이요, 또 하나는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그때 그들>에 대한 최종 결론이다.

그의 '의도가 담겨 있는 역사관'은 이렇다. 국민은 예수를 바랐으나 베를루스코니는 예수인 척 국민을 속였을 뿐이며, 그의 권력과 부의 부스러기를 먹기 위해 매달렸던 주변 아첨꾼들도 마찬가지 '악인'이다. 유일한 저항자 '아내'가 있었지만 그는 베를루스코니의 공정 생활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이 같은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영화는 대지진이라는 천재지변으로 '파국'에 이른다. 이런 해석과정을 통해 우리는 영화 <그때 그들>에게서 숨겨진 스토리 라인을 찾을 수 있다. 권력자와 권력자 주변의 아첨꾼, 어리석은 국민의 3자는 모두 '하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소렌티노 감독의 '기독교적 역사관'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이 같은 해석은 앞서 지적했던 양과 예수상의 상징과도 일맥상통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의 역사관을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측면도 있다. 지난 번 글에서 계속 강조해 왔던, 바로 문화적 측면이다. 영화는 '현실'을 담지하고 있으며 그 '현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Taken-for-granted)' 성격, 즉 '상식'과 '문화'의 성격을 갖는다. 감독의 '상식'과 '문화'가 영화에 녹아든다는 것은 피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 그들>에 담겨 있는 '상식'과 '문화'의 실체는 <그때 그 사람들>과 비교할 때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어떻게 최고 권력자의 주변인들은 그의 독재, 비리, 음란, 퇴폐 등 심각한 범법ㆍ탈법 문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인가. 바로 이 점이 우리나라 관객 입장에서 보면 기이하다. 이탈리아와 우리나라의 '상식'과 '문화'는 그만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차이가 베를루스코니라는 문제적 인물을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려놓았고 지금까지 장수할 수 있게 만든 '비결'이 아닐까? '정치'와 '문화'의 관계는 지난 번 글을 참조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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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이코노텔링대기자❙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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