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2 00:10 (수)
창립60주년 교보 창업회장 신용호의 '교육보험 신화'
창립60주년 교보 창업회장 신용호의 '교육보험 신화'
  • 고윤희 이코노텔링 기자
  • yunheelife2@naver.com
  • 승인 2018.12.19 1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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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사업 도전과 좌절끝에 '보험거인'으로 … '국가부도의 날'IMF때는 고용 늘리고 가정주부를 보험설계사로 기용
대산 신용호 창업주는 세계보험업계의 거인이었다. 1983년 세계보험대상을 받았다. 그가 고안한 교육보험은 세계처음으로 그가 고안한보험상품이다.그는
대산 신용호 창업주는 세계보험업계의 거인이었다. 1983년 세계보험대상을 받았다. 그가 고안한 교육보험은 세계처음으로 그가 고안한보험상품이다.그는 "맨 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는다”라는 말을 자주했다. 줄기찬 그의 도전정신은 그가 생전에 벌인 사업이 얼마나 다양했는지를 살펴보면 금방 알수 있다. '1000일 독서'에서 나온 그의 문학과 사업가적 상상력은 그가 교보문고의 문을 열때 말한 말에서 그대로 녹아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대산신용호기념사업회 제공)

우리 기업의 역사를 돌아보면 적잖은 창업주들이 일제 강점기의 차별을 딛고 일어선 흔적을 살펴 볼 수 있다. 올해 창립 60주년 맞는 교보생명 신용호업회장(1917~2003)도 그렇다. 신 창업 회장의 아버지와 형이 항일농민운동과 일제의 수탈에 항거했다가 수감됐다. 자연히 신 창업주의 집안은 요시찰 대상이 됐다. 그는 어릴 때 허약했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학교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집안의 항일운동’ 때문에 수학의 기회를 놓쳤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독학을 했다. 주변에서 보통학교 교과서 등을 빌려 독파했다. 특히 그는 ‘1000일 독서계획’을 세워 열흘에 한 권씩 100권을 읽었다고 한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땅에 교보문고를 내려고 하자 경영진의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나중에 창업주의 독서의지의 전력을 알고 나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고 말했다.

실제 신 창업주는 한 때 문학가가 되려는 꿈을 꾸었다. 그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애국시를 쓴 이육사와 교분을 나눴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용호는 이력서의 학력난을 메울 수 없었다. 따렌중학교와 베이징대학을 다녔다는 소문도 있지만 졸업 흔적은 없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학력난에는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배운다’라고 썼다.

하지만 다독과 독학으로 다져진 그의 지식은 폭 넓었고 깊었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 교보 본사빌딩 정면에 내걸리는 ‘대형 글판’은 신용호 창업주의 문학적 상상력이 낳은 작품이다. ‘위로의 벽보’다. 1991년 1월 부터 지금까지 광화문을 거리를 걷는 시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내로 라라는 시인의 한 줄 시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교보생명측은 “사람들이 한 줄의 시에 감명을 받고 이를 음미하는 여유가 있는 세상이 광화문 글판이 꿈꾸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신용호 창업주가 해방직후 국내에서 본격 사업을 벌일 즈음의 모습이다.
신용호 창업주가 해방직후 국내에서 본격 사업을 벌일 즈음의 모습이다.

집안사정이 여의치 않아지자 그는 사업으로 눈을 돌렸다. 친척에게 돈을 빌려 여비를 마련해 외국으로 건너갔다. 현지 후지다상사라는 일본기업에서 한 달간 연수를 받았다. 하지만 월급장이를 거절했다. 사장에게 본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대리점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대리점을 운영하면서 판매사원에게 실적에 따라 월급을 줬다.성과급제를 도입한 것이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교보가 보험판매 저변이 두터운 것이 이런 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하간 신 회장은 대리점운영의 성공으로 꽤 두둑한 돈을 벌었다. 이를 발판으로 미곡 판매으로 변신해 만주지역에서 손꼽는 쌀 유통업자가 됐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하자 중국은행에 예치해 뒀던 예금을 찾지 못해 빈털털이로 텐진에서 귀국선을 타야했다. 신용호 창업주가 손을 댄 사업은 참으로 다양했다. 모두 새로운 길이었으나 도전하고 부닥쳤다. 귀국 후 출판,직물,철강사업에 뛰어들었고 70년대초에는 건설과 목재,제지,도기 사업으로까지 발을 넓였다.

그의 경영자 자세를 가늠할 수 있는 일화 몇 토막이 있다. 6.25전쟁통에는 미처 피난을 못가 북한군 보안부대에 끌려갔다. 자신이 운영하던 직물공장 직원들의 탄원이 없었으면 목숨을 잃을수도 있었다. 직원들을 품에 안은 덕을 봤다.

전쟁후 복구사업을 겨냥해 설립한 한국제철이 야당 국회의원의 투자를 받았다는 이유로 은행대출을 막았다. 막 설비를 들여와 시운전을 앞두고 있던 공장을 닫아야했다. 그래서 신용호 창업주는 제조업은 자신에게는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방향을 보험업으로 돌렸다.

교보생명 신용호 창업회장의 제안으로 27년째 내걸고 있는 '광화문 글판'. 계절마다 일년에 네차례 바꿔 다는 이 글판에 쓰여진 싯구는 도시생활에 찌든 시민들의 발걸음을 붙잡아 그들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교보생명 신용호 창업회장의 제안으로 27년째 내걸고 있는 '광화문 글판'. 계절마다 일년에 네차례 바꿔 다는 이 글판에 쓰여진 싯구는 도시생활에 찌든 시민들의 발걸음을 붙잡아 그들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50년대 중반부터 제일생명,동방생명보험(삼성생명 전신) 등 보험회사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이다. 신 창업주의 시선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교육보험’이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고학력자의 수요가 늘 것으로 내다봤다. 자녀교육에 집안의 미래를 걸 만큼 교육열풍이 불었다. 1958년 닻을 올린 ‘대한교육보험’은 순풍을 탔다.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면 보험금을 주는 ‘진학보험’이 히트를 쳤다. ‘매일 담배 한갑으로 자녀의 교육을 평생 보장한다’는 광고 문구는 보험판매사원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보험경영의 전산화도 그가 앞장섰다. 1971년 '한국전산'을 설립해 보험업계 처음으로 컴퓨터시스템을 갖췄다. 교육보험으로 일군 자산은 종합금융그룹으로의 도약 발판이 됐다. 1993년 대한증권을 사들여 교보증권을 만들었고 장기신용은행 경영에도 참여했다.

'국가부도의 날' IMF 외환위기 때는 ‘실직자 보험’을 선보였고 자신의 회사인 교보생명은 신입사원 모집규모를 더 늘렸다. 또 가정주부들을 보험설계사로 뽑아 어려워진 생계를 돕도록 했다.

교보생명의 전신 '대한교육보험'은 교육열풍을 업고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사옥에 걸린 교육보험이라는 간판이 정겹다.
교보생명의 전신 '대한교육보험'은 60년대초 교육열풍을 업고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사옥에 걸린 교육보험이라는 간판이 정겹다.

1981년 6월 문을 연 교보문고는 60만권의 도서를 구비했다. 당시 경제규모로 볼 때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교보문고는 대한민국의 자랑거리였다. 종합상사직원들은 외국 바이어들이 오면 교보문고를 보여줬다. 한국의 저력을 보여줄 만한 곳이 그리 많을 때가 아니었다. 신 창업회장은 교보문고를 열면서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글 귀가 새겨진 교보문고 입구의 표지석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교보문고의 탄생은 한국지식 문화발전의 큰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신 창업주는 평생 신용카드를 쓰지 않았다. 돈의 가치를 느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또 “맨 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는다”라는 말을 자주했다. 그의 집념과 도전정신을 엿볼 수 있는 어록이다. 평생을 줄기차게 새로운 일에 나섰던 그는 2003년 8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000일 독서'가 낳은 그의 사업과 문학적 상상력은 그 때 멈췄다. 그러나 그가 교보문고를 열면서 임직원들에게 당부한 '5계'(戒)에는 그의 ‘책사랑 여운’이 큰 울림이 돼 지금도 퍼지고 있다.

“⓵초등학교 학생들에게도 존댓말을 쓰고⓶ 한 곳에서 책을 읽는 것을 방해해선 안된다⓷책을 펴보기만하고 사지 않아도 눈총 주지 말라⓸노트에 책을 베끼더라도 그냥 두라 ⓹행여 책을 훔쳐가도 절대 망신주지 말고 눈에 띄지 않은 곳으로 인도해 타일러라.”<한국社史전략연구소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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