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처 관료로 꾸린 건설TF팀엔"완공 못하면 버스값은 줄테니 한강에 투신하라"
1969년 6월 3일, 쓰루는 부총리 취임식을 마치고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자 바로 벽에 걸린 칠판 앞으로 다가서더니, 단숨에 ‘綜合製鐵(종합제철)’ 네 글자를 휘갈겨 썼다. 그러곤 비서에게 “종합제철이 완공되거나 내가 부총리 목이 날아갈 때까지는 절대 지우지 마라!”고 일러두었다.
취임 5일 후 쓰루는 정문도 운영차관보(쓰루의 부산상고 후배였다)를 단장으로 상공부, 건설부, 포항제철 등의 14명으로 구성된 ‘종합제철건설사업 계획연구위원회’(종합제철건설전담반)를 설치했다. 그 TF팀을 사무실로 불러 한 줄로 세워놓고 일갈했다.
“네놈들의 선조나 자손 대대로 이와 같이 민족적이고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사업을 맡아서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기획원엔 출근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종합제철에만 매달려라. 이 사업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성취해야 한다.”
그러고는 “느그들이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 만약 다하지 못한다면 살아남을 자격이 없다. 버스값은 내가 줄 테니 한강에 가서 빠져 죽어라”라는 으름장으로 그들의 퇴로를 불태워버렸다.
그는 종합제철소에 대한 박통의 집념을 잘 알고 있었다. 쓰루는 경제수석으로서 대통령 옆에서 어떻게 왕초와 박충훈 부총리가 물러나게 되었는지를 지켜보았다. 어느새 포철은 ‘부총리의 무덤’으로 불리고 있었다.
종합제철은 1950년대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한국 정부의 숙원사업이었다. 그것은 공업 강국의 상징이었다. 종합제철(‘산업의 쌀’)은 경부고속도로(‘산업의 대동맥’), 울산 석유화학단지와 더불어 2차 계획의 3대 중점사업 중 하나였다.
당시 한국의 제철산업은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하는 영세업체가 태반이었다. 공급은 수요에 턱없이 모자랐고, 기술 수준은 형편없었다. 기술이라고 해봐야 전쟁이 남기거나 해외에서 수입한 고철을 녹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연평균 10%에 육박하는 경제성장, 특히 건설 붐으로 인해 철강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 수요의 대부분을 수입(75%)이 채워갈 수밖에 없었다.
종합제철소 건설은 1969년까지 총 6차례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선진국 또는 국제금융기구의 차관 제공 거부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통은 1968년에 종합제철소를 추진할 법인으로 포항제철을 설립하여 종합제철소 건설 의지를 국내외로 내보였다.
쓰루가 부총리가 되기 직전 1969년 봄에는 선진국 철강업체 8개 사로 구성된 KISA(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대한(對韓)국제제철차관단)가 경제성을 이유로 차관 제공을 공식적으로 거절했다. 당시는 브라질 등 잠재적 내수시장이 어마어마한 개도국이 엄청난 차관 지원에도 불구하고 종합제철 건설사업에 실패해 세계은행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블랙(Black) 세계은행 총재는 “개도국에 세 가지 신화가 있다. 그 첫 번째는 고속도로 건설이고, 두 번째는 종합제철소 건설이며, 세 번째는 국가원수 기념비 건립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개도국의 무모한 국가 건설사업이라면 치를 떠는 인물이었다. 그런 세계은행에 그런 총재였으니, 규모의 경제를 기대할 수 없는 작디작은 한국이 종합제철소를 건설하겠다고 나섰을 때 차관을 줄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