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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만든 사람들⑤ '팝아트'신화 쓴 앤디워홀
뉴욕을 만든 사람들⑤ '팝아트'신화 쓴 앤디워홀
  • 곽용석 이코노텔링기자
  • felix3329@naver.com
  • 승인 2018.12.03 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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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뛰어 넘는 안목 … 뉴욕 현대미술관에 걸린 그의 판화엔 여전히 구름 관객
20대의 앤디워홀 (사진=잭 미첼)
20대의 앤디워홀 (사진=잭 미첼)

갓 20살의 청년 앤디 워홀은 1947년 처음 뉴욕을 방문한다. 그리곤 뉴욕의 매력에 완전히 빠진다. 아마 뉴욕의 매력은 자유스러운 공기와 다양성에 있었으리라.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뉴욕은 지금이나 그 때나 매력적이다. 그 누구도 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런 자유스러움이 있는 곳이 뉴욕이다.

 앤디 워홀도 젊은 20대에 친구 찾아 뉴욕을 들른 그 당시에 그런 마력을 느낀 것이다.

 물질적으로도 넘쳐났던 바로 1940년대의 뉴욕은 앤디를 끌어 당기기엔 충분한 도시였다. 대학 졸업후 그는 1949년 작심하고 다시 뉴욕에 온다. 정착하며 죽을 때까지 뉴요커로 산다.

그를 불러 팝아트의 아이콘이며 선구자라고 한다. 팝아트는 'Popular Art'의 약자다. 광고ㆍ만화ㆍ보도 사진 등을 그대로 활용, 그림의 주제로 삼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 기본 그림으로 하여 자신들이 주장하고 싶은 예술적인 생각을 담아내는 작품을 만든다.

뉴욕현대미술관 입구에 걸린 앤디 워홀의 판화작품. 대중들이 즐기는 캔 상품인 ‘캠벨’의 60여 가지 맛을 표현한 작품. 가격이 수백억대에 이른다고 한다.   보는 이로 하여금  ‘이것도 예술인가’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아이디어가 심플하다. 그게 팝아트의 특징이다.(사진=곽용석 이코노텔링 기자)
뉴욕현대미술관 입구에 걸린 앤디 워홀의 판화작품. 대중들이 즐기는 캔 상품인 ‘캠벨’의 60여 가지 맛을 표현한 작품. 가격이 수백억대에 이른다고 한다. 보는 이로 하여금 ‘이것도 예술인가’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아이디어가 심플하다. 그게 팝아트의 특징이다.(사진=곽용석 이코노텔링 기자)

앤디는 피츠버그에서 1928년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체코 출신의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아버지는 어릴 적에 일자리를 잃어 집안 형편이 썩 좋지 않았다. 공사현장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1942년 앤디가 14세 때 사망한다. 어머니 혼자 아들들을 키운다. 대학(카네기멜론 대학교)을 겨우 졸업한다. 전공은 상업 예술이다. 어머니의 예술성을 이어받은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한번 빠진 뉴욕으로 건너와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그는 전공을 살려,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아트 디렉터, 그래픽 화가 등 그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해냈다. 그런 그의 실력이 조금씩 인정받으면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다. 그의 성격도 한 몫 더한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하얗다. 거기다가 수줍음이 많아 말을 거의 하지 않고 듣는 편이다. 소극적인 편인 데다가 조용하게 상대방 말을 경청한다는 점이 오히려 사람을 매력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앤디는 그저 말하고 싶지도 않고 할말도 없고 남들처럼 떠들고 싶은 성격도 아니어서 그렇게 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런 그가 오히려 매력적인 인간으로서 호감을 갖게된다.
그래서 그는 친구가 많았고, 항상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한다. 그의 스튜디오나 파티장에서 유명화가나 작가만이 아니라, 동성애자, 약물 중독자, 히피 등과도 가족같이 지내기도 했다. 그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의 예술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단순한 물품인 코카콜라나 음식깡통 등 주변 물품을 소재로 활용하며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그저 단순한 복제판화의 메시지가 아니다. 다양한 인적교류와 공감속에서 얻어지는 결정체이기에 지금도 그의 작품은 녹슬지 않았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사후에 유명해지거나 작품가격이 올라가는 경향이 있지만 그는 살아 생전에 그의 작품성과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만큼 인간성과 그의 매력이 인정을 받었던 셈이다. 그로 인해 오히려 급진주의자한데 암살도 당한다. 그의 스튜디오에서 남성혐오주의자의 저격을 받았다. 총알 3발이 그의 몸에 박혔으나 극적으로 살아남는다.

 이후 그는 인생은 '더불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좀 정제된 삶을 살아간다. 방탕과 파티들을 멀리한다. 그로 인해 정신적으로 성숙한 경지에 이른다. 너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 보다는 좀 더 고민하며 좀 더 조용하게 그의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던 1987년, 59세에 담낭 수술 합병증으로 급사한다. 짧은 시간동안 남들이 하지 못한 것을 대부분을 경험하고 간 것 같다. 역경에서 성공까지.

 앤디 워홀은 스타 작가가 되고 난 후에 '자신은 어떤 사람이냐'라는 질문에, "나를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봐 주세요.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며 철저하게 '예술가의 내면'은 없다고 단정했다.

 맨해튼 53번가에 있는 뉴욕현대미술관 갤러리에 걸린 그의 판화작품 앞에는 항상 사람들이 구름 같이 몰려든다.

<곽용석 이코노텔링기자/미국 뉴욕주 공인중개사/henryk@nestseeker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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