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근대화 기여하려 했지만 유신체제에 등 돌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당시상황에 맞춘 허구

김일성 사망 한 해 전인 1993년, 국내에서는 한 권의 소설이 세상을 흔들었다. ‘한국의 핵 개발’을 소재로 한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날개 돋힌듯 팔렸다. 300만부 이상 찍었다.
소설가 김진명씨가 당시 북한핵 개발 의혹 분위기를 타고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쓴 책이다. 그 책의 주인공 ‘이용후’가 당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던 재미과학자 ‘이휘소’로 알려지면서 독자들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으로 귀국해 핵개발을 주도하다가 미국 정보당국의 간섭으로 실패했고 주인공은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이다.
1979년 카터 미국 대통령은 박정희의 독재를 비난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운운했다. 그 배경에는 박 대통령이 자위적인 차원에서 독자 핵무기 개발에 나선 점이 미국의 눈을 거슬렀다는 가설이 그럴듯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허구이다.
이휘소 박사는 1952년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으나 물리학에 더 흥미를 느꼈다. 마침 미군 장교 부인회의 장학생으로 뽑혀 미국유학길에 올랐다. 마이애미대 물리학과에 편입해 1년6개월만에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피츠버그대에서 원자핵 이론을 강의하던 교수의 도움을 받아 펜실베이니아대로 옮겨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노벨물리학상 수상 가능성이 큰 학자로 세계 물리학계는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지만 과학자로서 고국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조국의 경제 근대화에 이바지하겠다는 뜻도 여러차례 밝혔다고 한다. 문제는 이 박사가 대학생과 대학교를 탄압하는 한국정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1970년대 초반 한국과학기술원 설립을 주도했던 학자 중의 하나인 정근모 전 과기처장관의 여름학기 강의요청도 거절했다.
이와관련해 정근모 박사는 “방한을 종용했지만 끝내 성사되지 않았고 그게 그와의 마지막 접촉”이라고 밝혔다. 이 박사는 비핵신봉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의 핵무기 보유 시도가 있었다 해도 협조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고 정 전 장관은 덧붙였다.
그의 전공은 소립자 물리학으로 핵무기는커녕 원자력과도 거리가 있는 분야였다.이 박사는 77년 6월 미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교통사고를 김진명 소설가는 핵 개발을 시도하다 살해됐다는 일부의 억측을 소설에서 가공한 것이 아닐까.